지난밤에도 눈이 내렸고 날은 어김없이 추웠다. 출근길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남자 멋 좀 부렸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한눈에 봐도 댄디한 멋쟁이였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지만, 짙은 네이비 색의 피코트와 허벅지에 핏 하게 달라붙는 베이지색 면바지가 잘 어울렸다. 런웨이처럼 눈길을 걷는 그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는 눈 내린 언덕길을 내려와 이내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선 느닷없이 브레이킹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2-3초 정도 지속된 정체 모를 몸짓. 그건 분명 춤인 듯 보였다. 뭐야 댄서였나. 날렵한 코의 구두가 허공을 갈랐다. 현란한 스텝이었다.
나는 그제야 오늘 아침 기상청 안내 메시지를 떠올렸다. 낮은 기온으로 인해 밤새 내린 눈과 진눈깨비가 얼어붙었다고, 살얼음이 낀 바닥이 매우 미끄러우니 사고를 조심하라는 메시지였다.
눈 온 뒤 얼어버린 길을 걷는 건 아슬아슬 어렵다. 이때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는 어떻게든 걸으려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얼음길에선 ‘잘’ 걸으려 할수록 걷기 힘들다. 걷는다는 건 결국 땅에 발을 디뎌 밀고 나아가는 것인데 마찰력이 줄어든 얼음 위에서 걸을 생각부터 하니 예외 없이 미끄러질 수 밖에.
하지만 내겐 그런 길을 걷는 노하우가 있다. 그건 바로 걷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진 몰라도 나는 잘 걷기 위해서, 걷지 않으려 한다. 걷지 않고 미끄러질 생각부터 한다. 발바닥을 바닥과 밀착한 채 가능하면 떼지 않고 양발을 비비듯 교차해 얼음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아간다. 그러니까 땅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나만의 비법이다.
걷기를 포기하고 처음부터 미끄러져야겠다 마음먹으면 — 휘청휘청 불안해 보일 수는 있어도 — 어지간해선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나 넘어지더라도 애당초 미끄러지던 중이었으니 걱정만큼 아프지 않고 당황할 일도 없다. 실제로 이 방법을 깨우친 뒤로, 나는 눈길을 걷는 일이 두렵기보단 즐거워졌다. 언제든 넘어져도 괜찮다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살얼음이 껴 걷기 어려운 길이 비단 출근길만은 아닐 것이다. 20년 여름, 장애를 가진 재이가 태어나고 내가 사는 세상엔 멈추지 않는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벚꽃이 핀 아파트 단지 안에,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푸른 나무가 보이던 정자동 거실에, 할 일이 잔뜩 적힌 메모지가 붙은 회사 책상 위에. 눈 길 닿는 곳마다 온통 눈이었다. 치우지 않으면 녹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영영 행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말끔히 쓸어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람 한 명 지나다닐 좁은 길 하나를 겨우 내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마저도 꽁꽁 얼어 이젠 얼음길이 되었다.
어느덧 3년째 그 길을 더듬더듬 걷고 있다. 이제 인생길도 꽁꽁 언 눈길 걷듯 걸어보기로 혼자 조용히 마음먹었다. 언제 다시 내릴지 모를 눈이 여전히 두렵지만, 슬픔 위를 그저 미끄러져 나아가려 한다. 한 발 한 발 의미를 부여하면 넘어지고 마는 길, 오직 초연한 마음으로 자연스레 걸어가야 행복에 닿을 수 있는 길을.
이제 받아들이려 한다.
신호가 바뀌자 주춤주춤 대는 사람들, 나는 한발 스윽 얼어버린 횡단보도 위로 들이 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리듬을 타며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넘어질 것 같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