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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늘바람 Oct 02. 2019

Y와 나

Y가 울었다_2019 1월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잠시 휴가를 내어 한국에 들어온 Y를 만났다. 우리는 각자의 스케줄 때문에 아침 8시 반에 강남역 2번 출구 앞 카페에서 겨우 한 시간의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만났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Y는 나의 사촌이다. 엄마의 동생, 돌아가신 막내 이모의 첫째 딸이고, 지금은 미국에서 산다. Y는 미국에서 살기 전에는 서울에서 살았고 그 전에도 교환학생 같은 것으로 자주 외국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전에는 분당에서 살았고, 그전에 아주 오래전에, 우리 부모들이 우리 나이였을 때는 성수동에서 다 함께 모여 살았다.


  Y는 그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우리 엄마가 지금 내 나이였다는 게 믿어져? 우리 그때, 다들 막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랬을 땐데. 같이 한강까지 차 타고 가서 고수부지에서 놀았는데.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Y는 우리가 같이 한강 고수부지에서 놀았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내 나이에 매일같이 출근을 했다. 아빠도 그랬다. 막내 이모는 그즈음부터 암웨이를 팔기 시작했던 것 같다. 셋째 이모는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파마를 해주거나 머리를 잘라주고, 사촌들의 숙제를 봐주었다. 할머니는 한 동네에 사는 딸들의 집을 돌며 직장에 나간 자식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손녀들을 돌보았다. 넷째 이모 딸은 내 손을 잡고 놀이터 근처를 돌면서 회양목 잎사귀로 돛단배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둘째 이모의 딸은 벌써 고등학생이어서 어린 사촌들보다는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다.


  사촌들은 다들 대기업의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파트를 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는 각자 사업을 꾸렸다. 시간이 더 지나자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고 낳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혼을 한 사람도 있다. 암에 걸려 아픈 사람도 있다. 그 사이에 큰 이모부가 돌아가셨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막내 이모는 아주 오래전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를 낳았을 때의 부모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가끔 막내 이모 생각이 난다. 그 횟수는 점점 줄어든다. 이제는 이모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부분적인 느낌만 남아있다.


  이모는 암 중에서도 희귀한 설암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문 케이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가진 이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쯤 되었을 때 이모의 집에 놀러 가서 김치볶음밥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 후, 이모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모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이문세 라이브 앨범 테이프였다. 그때는 씨디가 있었지만 흔하지 않았고, 중학생이 살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은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서 이모는 병세가 악화되었고, 얼마간 병원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었다.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던가, 소나기가 내리던 여름이었던가. 나는 내가 실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실제로 죽을 수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아픈 일이었는지,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 말고는 답이 없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Y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우리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죽음에 대한 체감은 시간이 지나야만 오롯해진다.     

  언젠가부터, 이모를 생각하기보다는 이모의 두 딸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한다. 그들이 자라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제 와서야 생각해본다. 나처럼 가끔 생각하지 않겠지, 그들은.


  한 동네에서 다 같이 모여 살던 친척들 중에 막내 이모가 돌아가시고, 큰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 세대는 자매들이 한동네에 모여 함께 살고 함께 애를 낳고 키우는 삶은 살지 못할 것이다.      


  Y는 시댁이 싫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들 하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아, 다들 사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비슷하게 살아야만 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버려, 그 시스템 안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어,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라고 말했다. 서울에 살면 일 년에 몇 번씩 시댁의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얌전하게 있어야 해. 난 그런 내가 싫어,라고도 했다.

  “우리 시댁은 안 그래. 우리 시어머니는 내가 제사 지낼 때 안 와도 뭐라고 안 하셔. 우리 시어머니는 우리가 놀러 가면 용돈도 주셔.”

  “너네는 막내라서 그런 거 아니야?”

  “형이 있었어. 그런데 오래전에 돌아가셨어. 십오 년도 더 됐어. 대학교 다니다가 군대 다녀와서, 아주 어린 나이에. 시어머니는 아직도 형 보러 한 달에 한 번씩 가.”

  그러자 Y가 울었다. Y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울 수 있는 사람이다.

  "자세한 정황은 몰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해줘. 하지만 군대에서 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아. 군대 내에서 폭력을 당했을지도 모르고."

  Y는 나의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슬퍼했다. 진심으로 동정을 느꼈다.      


  얼마 전에는 친구 R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R도 외국에서 산다. R의 부모님은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낙도 의료봉사를 하시고 치매 독거노인을 돌보셨다. R은 외국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비행기 표를 끊어서 한국에 왔다. 나도 급하게 검은 옷을 사고 다음날 장례식장인 함양으로 향했다. 몇 달 전부터 병세가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생겼다. 서로의 앞에서 절대로 울지 않았다. 서로의 앞에서 엄마 걱정을 하거나 슬픈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재밌는 얘기를 했다.  '같이 사업을 할까?', '같이 어디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와 비슷한 이야기만 나눴다. 억지로 다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어떻게든 잠시라도 정신을, 감정을 속여야 했다. 한참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나마 깔깔거리며 웃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나는 친구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힘들지, 괜찮아, 엄마는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위선적이고 건방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구에게 슬프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왜냐면 나는 그것을 결코 체감할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평소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저 다른 이야기들을 나눴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탔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서 버스를 갈아탔어, 함양은 처음 와봤는데 좋은 도시인 것 같아, 밥 나르고 치우는 거 도와주려고 했는데 도와주는 친구들이 많네, R은 너무 울어서 몸에 소금기가 필요한 것 같다며 수육과 함께 나오는 새우젓을 계속 집어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 3시까지 국화의 꽃잎을 따서 모았다. 친구가 엄마와 함께 뿌려주고 싶다고 해서 밤새 실없는 얘기를 나누면서 꽃잎을 땄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계속 찬송가를 불렀다. 모르는 노래여서 그저 듣고만 있었는데, 내가 죽으면 누군가들이 모여서 노래를 불러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가 아는 노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 같이 차를 타고 화장터로 향했다. 봉분을 만들지 않는 공원묘지에 도착해서야 아무도 국화 꽃잎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짧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이 죽음을 이해하고 체감하기까지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R은 이제 다른 사람의 죽음에 진심으로 깊이 공감하고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2019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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