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장 폴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지수에게 인생은 불행과 더 불행 사이의 씨발일 뿐이었다.
불쾌지수. 여름만 되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그 숫자는 지수의 별명이었다. 삼명고등학교 1학년 3반, 그녀의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김정현. 담임선생님이 그녀의 출석을 부를 때, 그녀는 항상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한숨만 짧게 쉬며 넘어갔다.
“야! 미지수.”
어느 날 하교하던 그녀가 지수의 헤드폰을 벗기며 말했다. 미지수. 영광스러운 별명이 또 하나 늘었다.
“우리 노래방 갈 건데, 같이 갈래?”
정현의 뒤에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머리는 왁스로 떡 칠한 남자 세 명과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타이트한 치마에 얼굴은 화장으로 떡 칠한 여자가 두 명 더 서있었다. 순식간의 지수의 얼굴 근육은 마비되었다. 저 자유 분망한 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을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다.
“아니, 학원 가야 해서.”
그녀의 입에서 자동으로 흘러나온 거짓 변명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아니었다면 정현이 다른 이유를 만들어내서 자신을 끌고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쉽네, 다음에는 꼭 와라.” 정현이 손에 들고 있던 헤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헤드폰을 돌려주기 전에 교문 쪽을 한 번 봤다. 지수는 다른 날라리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걸어가는 정현의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 그녀가 봤던 교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문 높은 곳에는 CCTV가 달려 있었다. 만약 CCTV가 없었으면 약 20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 본 지수는 몸을 떨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다음날 정현은 나오지 않았다. 소년원에 들어갔다고 했다. 절도와 특수 폭행. 노래방 점원을 아주 반 죽여 놨다고 했다. 담임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지수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나중에 대학교에서 들은 소문으로 정현은 성인이 되어서 다시 감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지수는 사양대학교,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은 죽어도 꼭 나와야 한다는 엄마에 의해, 그나마 재수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던 안전빵. 모든 학생이 가기를 사양해서 사양대학교라는 학교. 그래도 충주에 있는 집과 가깝다는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 대학교의 그 학과는 취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십 장의 이력서는 한숨이 되어서 그녀의 입을 통해 나왔고, 충주에도 그녀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선배는 속도위반으로 아이가 생겼고, 지금 다니는 회사는 육아휴직 따위는 모르는 회사라고 했다. 따라서 자기가 퇴사해야 할 것 같으니까 취직할 생각 없냐는 전화였다. 방 안에 굴러다니던 수십 장의 이력서가 없었다면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의 통장에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가 찍혀 있었다면 그 제안을 거절했을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없이 서울에 월세방을 계약했다.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에 오르던 순간에도 기쁘지 않았다. 친구들은 서울로 상경한다면서 그녀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서울. 헤드셋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서울. 천식환자에겐 지옥이라는 서울. 그녀에게 서울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현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남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교와 학과에 들어간 것도, 텔레마케터 회사에 취직한 것도 그녀의 ‘선택’은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선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타인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돌려버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책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에서 ‘어쩔 수 없는’을 빼 버리기 때문이다.
지수는 건대입구역으로 들어오는 치하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녀는 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