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게 무섭다고 말해주지 않았잖아
아빠, 가을엔 오름을 올라야 해!
제주에서 오롯이 느끼었던 첫 번째 계절 여름이 지나갔다. 내가 사랑한 그 아름다운 찬란한 바다에 어느 순간 발을 담글 수 없게 되었을 때, 시간의 흐름을 체감했다. 여름이 간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새롭게 맞이하게 될 가을이란 계절엔 오름을 오르리라는 로망이 있었기에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오름이야말로 제주의 가을을 완연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엔 무려 368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중 이름부터 아름다운 '새별오름'에 오르게 되었다. 오름이란 단어도 정말 사랑스러운데 '새별'오름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다.
"가을에 오름을 올라야 진정한 제주의 가을을 느끼는 거야."라는 로망에 가득 찬 딸내미 말에도 아빤 굳이 힘든 오름을 왜 올라가냐며 의아해하셨지만, 어쨌든 우리 차는 이미 새별오름을 향하고 있었다.
때론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10월 제주의 새별오름은 정말 아름다웠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수많은 억새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렸다. 가을을 맞이해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억새에 홀려서 열중하여 사진을 찍느라 새별오름의 오르막 입구까지 정신없이 도착했다. 핸드폰을 막 주머니에 넣는 순간, 내게 펼쳐진 오름의 모습은 상상과 달랐다. 텔레토비에 나오는 평화로운 동산같은 오름을 생각했는데, 내 눈앞엔 경사가 거의 70도인듯한 당황스러운 새별오름이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잖아..
이 정도로 무섭다고..
정상의 멋진 풍경 사진만 보고 아주 위풍당당하게 나섰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어쩌지- 싶었던 찰나 아빠가 오셨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 하셨는데 꽤 높아 보였던 오름을 보며 정상까지 올라가면 딸내미가 추울 것 같아 걱정이 되셨던 듯싶다. 한 손엔 항상 자동차 트렁크에 준비해 놓는 아빠의 바람막이와 가디건, 담요를 챙긴 쇼핑백을 들고.
아빠 오름이 너무 높아..
사진도 찍었으니 돌아갈까 봐.
온 김에 같이 올라-
결국 아빠와 함께 새별오름을 올랐다. 아니, 아빠와 함께라서 '겨우' 새별오름을 올랐다.
오름을 오르던 약 10여 분간 정말 무서워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정-말 무서우면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것처럼(학교에서 뱀을 마주했을 때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난 오름이 정말 무서워서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떨어질 것 같았기에 본의 아니게 오름을 쉬지 않고 폭풍 질주를 하면서 올랐다. 숨이 차도 계속 올랐다.
내가 여길 왜 오겠다고 했을까, 인스타그램에 속았지, 오르는 힘겨운 과정은 모르고 정상에 오른 사진만 보고 감탄했지... 내가 선택했기에 입 밖으로 차마 낼 수 없던 수많은 자책과 후회를 맘 속으로 하면서 오름을 올랐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정말 황홀한 10월 제주의 모습이 펼쳐졌다.
아, 이래서 오름에 오르는구나.
이 장면을 보려고 힘겹게 오르는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이 모습을 보려고 오름 오르는구나.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벌벌 기어 올라가던 모습을 숨기고 아주 멋지게 프로처럼 사진을 찍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새별오름에 오르는 그 과정을 아주 행복하게 즐긴 것처럼 굉장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었던 걸까.)
오름을 내려오는데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근처에 가보니 아기 노루가 숨어 있었다. 억새에 가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제 모습이 마치 안 보이는 줄 아는 귀여운 아기 노루.
그렇게 오름에서의 추억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인생이 오름이야
오름을 내려오면서 다른 누군가의 오름에 오른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은 숨이 차지만 열심히 오름을 올랐는데 그 과정은 생각않고 정상에 올라 멋있게 찍은 그 사진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마냥 부러워하고 쉽게 평가했던 건 아니었을까.
핑계 같지만 나는 (경영학 전공이라서인지)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투자한 시간과 돈, 에너지에 비해 초라한 결과가 나올 것만 같을 때 자기 방어처럼 아예 시도를 해보지 않을 때가 있다. 꽤 무모한 일을 도모할 땐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입구에서 본 경치도 꽤 근사하니 굳이 오름을 오를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인생의 특별한 한 장면을 잃을 수도 있는 아찔한 버릇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오름을 오르지 않았더라면, 정상에서 마주한 황홀한 10월 제주의 모습은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내려오면서 만난 까만 눈의 아기 노루도 큰 추억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오르지도 않은 오름을 추억하며 "그래, 올라갔으면 꽤 힘들었을 거야." 스스로를 달래주었겠지.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뒤돌아선 내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는 채로.
하지만 다행히도 아빠가 옆에 계셨다. 오름을 오르는 일은 분명 어렵고 힘들다고 말했음에도 씩씩하게 나섰던 딸내미가 오름 입구에서 겁을 지레 먹고 머뭇거리자 하얀 스니커즈에 흙을 묻히면서도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신 것처럼. 오름보다 더 크고 멋지신 분이 내 곁에 계셔서 참 다행이다.
아버지!
(앞으로도)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