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 이어'를 하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응?
갭 이어(Gap Year)
학업 또는 직무를 잠시 중단하고 봉사, 직업 체험, 여행 등을 통해 적성을 탐색하여 향후 진로를 설정하는 시간.
"쉬어가도 괜찮아"
"여행하며 진로 탐색"
갭 이어(Gap Year)는 최근 미디어를 장식하는 많은 기사와 프로그램의 트렌디한 주제다. 인생에 있어 여유를 즐기며 리프레시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멋지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동경했던 나에게 갭 이어란 '어쩌면 뒤처질지도 모르는 시간', '면접관이 함부로 나를 한심하게 판단할 수 있는 공백 기간'으로 느껴졌던 것은 사실이다.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 졸업을 했고, 졸업 전 취업이란 빠른 코스를 걸어가는 나에게 갭 이어란 단어는 마치 핀란드 같은 교육 강국에서나 하는 듯한 어색하고 불안한 단어였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뭐 야심 차게 '갭 이어를 가지며 나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야지'하고 결심했던 적은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굉장히 요즘 젊은이처럼 트렌디하게 갭 이어를 가지게 되었다.
내 상상 속 갭 이어의 열정 넘치는 젊은이는 자기 몸 만한 큰 가방을 메고 익숙하지 않은 나라로 훌쩍 떠나 이국적인 전망을 보며 미래를 꿈꾸는 청춘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냥 작은 캐리어 하나 슥- 끌고 제주로 향했다.
‘비행기 타면 뭐 똑같지 뭐.’
#제주다미의 시작
일단 여행의 시작이 너무 홀가분했다. (사실 나는 굉장한 쫄보라 혼자 여행을 멀리 떠난 적 없지만) 외국으로 가는 여행이었다면 퇴사 마무리를 하면서 여행을 위한 준비도 했었어야 했다. 내 성격상 그건 더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분명 도착하자마자 어리바리했을 것이고, 이것이 여행인가 업무인가 싶었을 것이다. 곳곳의 낯선 언어들에 몸은 얼어 버려서 아마 힐링의 여유로운 여행이 아니라 긴장의 연속이었을 듯싶다. 더군다나 아직 어설픈 것 투성인 내가 해외로 갔다면 우리 엄마와 아빠, 남자 친구는 밤잠을 꽤-나 설쳤을 것이다. (아마 10분에 한 번씩 전화가 왔을 것 같다)
퇴사 바로 다음 날 제주로 떠났기 때문에 난 아무런 '여행 계획'이 없었다. 그냥 며칠 입을 옷가지와 아빠한테 전하라는 할머니가 싸주신 몇 가지 짐들을 캐리어에 넣고 떠났다. 김포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갔고, 신분증 하나 들고 출발해 제주에 도착했다. 매일 보던 아빠를 비행기를 타고 와 오랜만에 타지에서 만나니 목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것처럼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아빠 차를 타고 해안 도로를 달리는데 여름을 맞이하려 준비하는 5월의 제주는 바람이 시원했고, 하늘은 청량했다. 바다의 모습은 몰디브나 하와이가 떠오를 만큼 투명하고 이국적이었다. 오래되진 않았지만 치열하고 바쁜 도시에서 살았더래서 그런지 내가 이런 아름다운 곳에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행복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제주에서 기분 좋은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나는 이 곳의 간판을 다 읽을 수 있고 또 내가 좋아하는 것들 -예를 들면 올리브영, 스타벅스, 맥도날드, 이니스프리, 이마트 등-이 다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일상 복귀 걱정 없는 여행
갭 이어의 첫 번째 제주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일상의 복귀 걱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초, 중, 고, 대학교, 회사 휴가까지.. 내 인생의 내가 기억하는 모든 여행은 대부분 즐겁고 행복했지만, 여행의 황홀함만큼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아쉬움과 스트레스가 컸다. 그래서 여행 마지막 밤이면 휴가의 끝자락이 아쉬워 마음 한편이 저렸다. 여행 끝나면 다시 돌아가서 공부해야 하네, 이 휴가 끝나면 회사 가면 일이 얼마나 쌓여 있을까. 이런 생각에 여행의 마지막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그런 걱정이 없었다. 내가 집에 가서 할 일이 없었다! (회사도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은 끊어 놓았지만 내 마음이 뒤틀리면 티켓을 취소하고 더 지낼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짜릿했다. 정말 짜릿했다. (이 맛에 다들 퇴사하는구나? :))
가고 싶은 곳을 인터넷과 SNS를 통해 찾으면, 아빠가 딱- 데려다주셨다. 때마침 일정이 맞은 친구가 제주여행을 오게 돼서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친구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사진 찍고 싶으면 사진 찍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되었다. 바다에 발장구를 치고 싶으면 발장구를 칠 수 있었다. 더 있고 싶으면 더 있어도 되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었다. 그런 소소하고 단순한 인간의 자유를 느끼며 매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나는 스물 다섯 이전에도 제주를 왔었다. 아주 꼬꼬마라 동생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5살 때,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순식간에 일정이 스르륵- 지나갔던 18살 때, 회사를 다니다 시즌을 끝내고 짧게 주말에 유채꽃 보러 왔던 올 3월. 그런데 이번의 제주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 내게 펼쳐진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겐 정말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던 그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야 하는 다음 코스가 없었고, 다음날 해야 하는 일도 없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 되었다.
즐기자, 제주.
#제주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