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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Aug 20. 2017

다가오는 것에 대한 아찔함

여태까지 운게 억울하니까 주사를 맞고 나서도 조금 더 울어줘야 한다.



어릴 적의 나는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저절로 진학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허나 그 당연스러웠던 모든 것들은 고역스러운 성실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낸 '어느 높이'였다. 그 고역의 성실이 가져온 결과물마저 '평범'에 수렴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며 감내해야 하는, 쌓아 올려야 하는 고역에 대해서 상상했고 아찔해졌다.


그동안 누려왔던 지극한 평범이 결국 보호자의 고역으로 다져진 것임을 알았을 때. 그리고 보호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는 성인의 길에 다다랐을 때. 멈추지 않는 시간으로 어쩔 수 없이 성인의 길에 올라야 할 때. 그동안 겪었던 나름의 고역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아찔했었다.


나에게 앞으로 어떤 고역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이 고역일 뿐 어느 달달한 보상은 시방 아직 멀고도 한참 멀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구직과 결혼에 대해서, 아니 독자적, 자주적 생활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 극도로 이기적이라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기심을 스스로 깨달았던 감성적 시간과 판단은 현재의 고역에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나와 동등한 위치의 사람을 비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교의 과정에서 나는 절망과 안도를 왕복하며 생각을 바꾸고 바꾼다. 나이가 점점 들어오면서 책임의 범위가 점차 증가하는 것이 곧 능력의 척도겠지만 책임이라는 단어는 아직 나에게는 너무도 무겁다. 아직 내가 쌓아온 고역의 높이가 너무도 낮은 것만 같이서.




어느 날인가 주변 지인들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면서, 나도 질문을 받았다. 만나는 사람이 없느냐고 말이다. 나는 근래 들었던 유사한 질문에 대해서 의연했는데, 그날따라 유독 아찔했다. 식사 때가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해야만 하는 행동의 적절한 시간대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아도 때를 맞추어 먹어야 저녁을 맛있게 먹고, 그에 따라서 이후의 시간들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듯이 말이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책임이라는 무게는 고역의 괴로움을 포괄한 거대함이자 순서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피하지 못했던, 앞사람이 울음을 터뜨려가며 맞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줄어드는 사람에 따라서 점점 내 차례도 다가와 숨통을 조이게 만들었던 초등학교 교실의 예방접종을 떠올렸다.


나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팔뚝에 알콜솜이 발라지는 아찔함을 느꼈다. 공포가 엄습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순간을 대처할 수 없어서 멍해졌다. 스크린에 펼쳐진 공포영화를 멈출 수가 없어서 그저 눈감고 귀 막은 채 끔찍하고 끔찍한 영화가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아니라.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끔찍한 잔상이 괴로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황을 맞이해야만 하는 무력감이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생각한다. 주변에 산재된 평범함이 결코 평범이 아니었음을. 호수에 떠있는 백조조차 물아래에서 발길질 혹은 발버둥 치고 있음을. 그 발버둥이 보통으로 자리 잡은 여기에서 나는 발버둥의 고역을 선택하던가 가라앉던가 해야 하는 것임을. 그 선택의 기로에서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점심때를 지나 저녁 끼니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차 서늘하다 못해 시퍼렇고도 뾰족한 질문을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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