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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Jun 19. 2016

누구나 손해는 본다

당장에는

곡성을 보게 되었다. 미리 말하면 나는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내가 아는 모든 욕을 동원해서 공포영화에 대한 증오를 퍼부을 수도 있을만큼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무서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늦은 시간.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보러 가잔다. 구미가 당겼다. 며칠만에 밖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어 휑뎅그렁한 도시의 차가운 밤공기도 무척이나 당겼다. 전화로 어떻게 놀까 갑론을박 하다가, 그 즐거운 논쟁의 시간도 아까워진 우리는 일단 밖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집 앞으로 차끌고 온댄다 고맙게도. 만나고 보니 한 명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를 끌고 온 녀석은 정해진 수순인 양. 영화 곡성을 보러가자 말했다. 나는 짧고 굵은 욕으로 대답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내 이름을 팔고 나온 그 다른친구는 나와 놀지 않으면 들어가야 한단다. 내가 거부권을 말하면 지금의 모임은 파토를 낸다고 약속한듯 덧붙였다.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다. 구두쇠인 나는 공포를 구매해야 하는 상황부터 적잖이 열받았다. 또한 무서움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거 별로 안 무섭다'는 타인의 말따위는 내 고통과 어떤 상관도 없었다. 실제 그것이 무서웠다고 한들, 내 선택이었으니 내 손해. 설령 무섭지 않았다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주변인의 득달같은 물어뜯음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명쾌한 답이 없었다. 어릴 때의 나라면 집으로 가버렸을지 모르지만, 그들 앞에서 고집쟁이의 명성을 한 번 꺾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엄살을 떨고 그러다 쌍욕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모두가 얼추 행복한 정치적 결말이었다. 쌍욕을 지껄이다 웃다가 또 욕을 하면서 미친 듯 홀린 듯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는 기분이 나빴지만. 나는 내 불편함을 감수했다는 빚을 그들에게 얹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내 앞에서 꺾여준 그들의 고집도 헤아릴 수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주장했던 고집에는 내가 공포를 피하고자 하는 것처럼 나름의 절박함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음도 깨닫게 되었다.


나보다 더 무서워하며 발작적으로 팝콘을 흩뿌린 친구가 미웠지만. 어떠랴. 나나 친구들이나 각자 새로운 경험에서 즐거움을 찾았다는 것. 그 속에서 함께였다는 것이 의미이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고, 그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름의 활력을 찾는 것이다.


손해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예측되는 손해를 피하고자 하지만 진짜 손해를 만나기  직전까지 손해는 손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었다.  특히 사람관계라는게 이득만 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아직 '뭣이 중헌지는 모르지만' 이득과 손해의 소용돌이에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해 낼 수 없었다. 그 소용돌이가 멈추고 나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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