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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말 Apr 14. 2018

질문을 두려워 말거라

질문 자체가 조용한 적막을 깨는, 일종의 하나의 파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잦단다. 수업이든 직장이든 어디든 말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다루기에는 지엽적이라 판단이 서고, 내가 보기엔 민주주의보다는 전체주의적 성격이 짙은 우리나라의 정서 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든다. 여기에다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적으로 주입된 사고방식 국민정서 추가.


생각을 해보면 6.25 전쟁을 겪으며 국민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의 편 가르기가 안긴 큰 상처와 후유증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 그리고 질문의 두려움이 출발하는 지점이 여기라고 아비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독재와 민주화를 오간 근현대사에서도 역시나 큰 상처가 남았다. 생각의 차이 때문에 강렬한 손해를 남겼던 과거가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지. 우리가 집단의 어느 전체적 움직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상당히 낯설어하고 있구나 느끼게 한단다. 그래서 아직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튀는 행동에 대해선 날 선 손가락질이 달려드는 경우가 아직도 많지.


"중간만 해라." 살면서 한두 번 정도는 꼭 듣게 될 날일지 모르겠구나. 아직까지 이런 말의 힘이 살아있는 사회적 상황에서는 질문은 이미 강력한 부담이란다. 이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질문하는 힘이 굉장히 약하단다. 떠먹여 주기 교육이 문제를 가속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기도 하지. 문제라면 문제다.


아비가 생각하는 교육이란. 졸업 이후 인생에 있어서 만나게 될 다양한 의문과 현상을 슬기롭게 해쳐나가기 위한 자립의 과정을 익히는 것이란다. 동물로 치자면 부모의 둥지를 떠나 홀로 독립하는 것. 고로 인간사회의 생활전선으로 나가는 것에 있어서 언수외사과탐구 문제를 푸는 것은 연습이나 훈련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고로 네 아비는 질문이 곧 자기 공부이며, 이를 잘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행과 착오라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단다.


질문처럼 직설적이며 솔직하고 담백한 배움이 없단다. 사회현상과 같은 문제처럼. 수학 문제가 아니고서야 딱 맞아떨어지는 답이 없는 문제는 질문을 통해 해결해야 하지. 아비는 질문이 곧 정답에 가까워져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의 힘으로 문제에 더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은 질문인 것이지. 질문하지 못하는 사람은 동물에 가깝다. 그것도 자립할 수 없는 동물에 가깝다. 그래서 아비는 질문할 줄 모르는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마주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단다.


질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단다. 본질에 다가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이들에게 기자라는 완장이 부여되었고. 그동안 억눌린 국민정서의 해소제라도 되는 듯 무분별하고도 어긋난 배설의 악취로 여러 사람에게 피해가 가고 있단다. 나는 네가 사회에 크고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네가 사회에서 나름의 욕심을 부리고자 한다면 아비의 이런 생각을 참고해주길 바랄 뿐이란다.


다행인 것은 아직 우리의 일부가 옳지 못한 질문을 판별할 수 있다는 점이란다.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은 올바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기레기라는 칭호도 만들었단다. 그럼에도 지금은 과도기인지, 아니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지는 확신이 서지는 않는구나. 아마 네가 세상에 나올 때쯤이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르겠구나. 


너의 세상은 질문으로 만들어질 것이며, 질문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러니 질문하자. 질문도 해야 는다. 그 질문이 기계처럼 문제만 풀던 혹은 살던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는 나도 질문을 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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