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느낀 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말 May 17. 2017

[긴 글] 잠 안 올 겸, 스승의 날 겸.ssul 푼다

겸사념사

세 사람이 지나간다면 그중 한 사람은 당신의 선생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에서 스승은 많고도 많았다는 말이며, 그들을 스승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스승이건 개새끼건 어쨌든 뒤돌아보니 배운 게 그래도 있기는 있구나 싶은 것들이 몇몇은 있다. 배웠다기보단 '저따위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였구나'의 자기 점검적 사건이 있었다는 말이 더 옳겠다.


나의 인생에 참 스승은 그러면 누굴까 싶다. 나에게 진정으로 본인을 기울이며 어느 것을 가르치고자 노력했던 자들은 누구일까 싶다. 아무래도 학교 선생보다는 과외 선생이 가르치는 절박함을 가졌던 것 같다. 뭐 지금 당장은 기억에 안 나고, 스승의 날 단물이 빠진 오늘은 그저 내가 살며 거쳤던 나쁜 선생님에 대한 것을 재미 삼아 훑어보고 싶다. 원래 인간은 때린 것은 기억 못해도 맞은 것만 기억하는 생물이다.



1. 내가 유치원에 다녔을 무렵. 부모님과 최초(?)로 떨어져 하룻밤 놀다(?) 온 것으로 기억한다. 어감상 선화원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곳이다. 지금 검색해보니 납골당인걸 봐서 존나 악한 유치원이 아닌 이상 내 기억의 오류가 틀림없겠다. 깊은 저녁으로 기억한다. 취침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누워서 오지 않는 잠을 부르지도 쫓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눈만 뜨고 누워있었다. 유치원 선생들은 유난히도 애들을 재우려 안간힘을 부렸다.


어거지로 애들을 눕히고는 밖에서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잠에 빠졌다. 아마 자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소리 내는 아이는 아무도 없이 그저 얌전히 있었다. 그러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가 아직도 안 자고 떠들며 노냐면서 선생님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쌍팔년도식 수사기법 중 하나인 '랜덤 포인팅 기법(a.k.a. 생사람 잡기 혹은 본보기)'을 적용, 누운 나를 들어 앉히고는 왜 아직도 안 자냐며 5 공화국 수사 기법인 '냅다 야단'을 쳤다.


나는 기억한다. 나의 억울한 감정. 한옥 여닫이 문에서 들이닥치던 차가운 밤바람 그리고 그년 입에서 풍기던 아직 따스한 닭도리탕 냄새를.



2. 국민학교 1학년 때. 나는 서울에서 의정부로 전학을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의정부는 교육적으로 무척이나 열악하며 거칠고 터프하며 우악스럽기 짝이 없는 동네였다. 나는 의정부의 야성에 기가 눌렸고 그 선생 덕분에 기가 더더 눌리게 되었다. 그년과 나의 조우는 전학 전날인데, 모친과 나는 전학 전 날 학교를 방문해 그년과 사전에 면담을 주고받았다. 나는 이삿날과 다음 날은 자연스레 땡땡이로 생각했던 골수 놀자판 학생이었는지라 모친의 결정에 잠시 이성을 집에다 놓고 옴을 전제로 한다.


알고 보니 그 년은 첫날부터 모친에게 돈을 요구했다. 양심 시민이었던 모친은 단박에 거절 의사를 밝혔고 그 후폭풍은 누구한테 돌아갔을까? 때때로 손바닥도 세게 잘 때릴 줄 알았던 그 년은 반 아이들에게 빈 봉투를 나누어 주기도 하였고, 수업시간 중간에 잡상인이 난입해 붓을 팔기도 했다. 어쩌다 그 년이 출장을 가는 날이면 나는 기분이 참 좋았는데, 그 날은 교과서를 필사한 후 그 공책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집에 가라는 집행 명령이 떨어진 날이었다. 나는 산만하고 집중을 못하는 초등학교 1학년이어서 그년의 과제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던 게 사건이다.


그 날은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전국 초딩 그림 대회가 있었다. 조선일보에서는 규격화된 도화지를 각 학교에 배부하였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 학교에 제출하는 것으로 학생의 일은 끝나는 대회였다. 나는 그냥 그림을 굉장히 잘 그려보고 싶어서 오랜 시간 깊은 고민을 한 후, 크레파스를 집었다. 크레파스를 내려놓고서 그림을 그 년 책상에 올려놓으려 갔고 거기엔 교감 센세가 앉아있었다. 교감은 내 그림을 보더니 빙긋이 웃었고 ^^ 칠판을 가리켰다.


칠판엔 엄청난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나처럼 산만한 몇몇의 남학우들도 눈물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교과서를 필사했다. 친구분 어머님들도 몇 분이 오셔서 그 광경을 사파리 했다. 악착같이 교과서를 필사하고 나니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있었다.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일단 그 당시 국딩 1학년이 그 시간에 나가는 것은 LA 흐긴 밤거리를 홀로 배회하는, 존나 만만해 보이는 동양인의 마음과 필적하는 것이다.


집은 신도시 같은 곳에 있던지라 걸어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 집 주변에는 기형적인 학원 영업이 성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등하교 서비스. 문제는 점심도 안 먹고 끝나는 국딩을 4시까지 기다려줄 리 만무. 출발지 목적지 모두 버스 정류장과 거리가 멀고, 버스도 오래 타지만, 결정적으로 집에 전활 걸어 모친 음성들을 한국통신 공중전화 요금마저 없었다. 너무나 암담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음을 그때 안 것 같다.


예술활동에 정신을, 필사 활동에 육체를 잃은 국딩은 1시간 동안 걸을 마음의 여유나 기타 모험심이 없었다. 그래도 집에는 잘 갔다. 상급생을 태우러 온 미술학원 차가 학교에서 국딩들을 쑤셔 박고 있었고 나도 기꺼이 쑤심을 당해주었다. 상급생 무서운 형 언니 오빠 누님 그리고 전영록 닮은 원장이 왜 이 시간에 학교에 있냐며 의아해했고 나는 말할 힘도 없었으나, 상급생은 무서워하는 전형적 국딩이었기 때문에 여차저차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원차는 등하교 서비스를 한 게 아니라 그 동네 학생을 학원까지 셔틀 운행을 한 것이기에 전영록은 나를 집이 아니라 학원 앞에 내려다 주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태권도 학원 차가 지나갔고, 하얀 도복을 입은 백의민족 나의 벗님들은 왜 이제야 집에 가냐고 창문을 열며 소리쳤다. 마침 태권도 학원차는 공사판 비포장 도로를 지나고 있던지라 좆같은 구형 디젤 특유의 굉음으로 나의 대답을 잡수었고, 흙먼지까지 선사했다. 집에 와서 야채참치와 고추장에 밥 비벼 먹고 태권도 학원 간 기억이 난다.



3.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격동의 80년대 생으로 사회의 많은 것들이 바뀌고 바뀜을 경험한 거친 풍파의 방파제와 엇비슷한 세대다.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뀐 디테일을 당신이 잡아냈을 리 만무하고, 여느 아재처럼 나는 이렇게 격동의 시즌을 추억하는 것이다. 쨋든 의정부에서 나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때가 나의 최고 문제아적 시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만 이렇지 별 일은 없으니 안심 바랍니다.


서울로 이사 온 나는 이삿날과 다음 날은 자연스레 땡땡이로 생각했던 골수 놀자판 학생관을 버리고 오지 못했던지라, 하루 땡땡이치려다 양친께 호된 참 교육을 받고 바로 학교로 향한다. 당시 그 날 모친은 각종 서류 문제 해결을 해결, 부친은 나의 전학 문제를 담당하기로 했다. 등교시간이 상당히, 꽤, 아주, 많이 넘은 시간. 학교에 도착해 행정절차를 마치고 교실로 갔다. 나는 부친과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나만 가라고 해서 조금 꽤 많이 겁이 났다.


의정부의 열악한 시설과는 다른 서울의 깔끔 정갈함이 어린 마음에 위축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봤자 할렘 4학군이지만 그 당시엔 그게 참 그래 보였다. 쨋든 교실 앞문을 열었고, 전학생이 간다는 시전 기별 따위는 받을 리 만무했을 그 사람이 놀란 표정이 눈에 보였다. 그 씨발새끼는 나에게 왔다. 너는 뭐냐고 했다. "저는 전학생인데요"라고 답했다. 그 씹새끼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고 수업을 멈추고 자기 책상으로 가서 나의 서류를 받았다.


"너네 엄마 이름이 ○○○이니? 내 이름도 ○○○인데." 그 개새끼 주둥이에서 나온 말이 아주 일품이었다. 모기 X물만큼의 과장이나 허구가 없는 적확한 워딩이다. 잊을 수가 없는 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가 버린 지금도 연변거지들 파견해서 빠이팅이 있는 년인지 가늠해보고 싶다. 쨋든 여린 나에게 크고 굵은 생채기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산만등급 상위권에 속하는 아이 었고, 의정부에서 온 아이라 그 호로새끼는 나에게 기대치가 낮았다. 나에겐 전달되지 않은 다음 날의 시험에서 내가 고득점을 하자 놀라는 눈치를 산만한 국딩이 알아먹었을 정도니 말이다. 아.. 이제 초딩이구나. 욕도 안 쓰겠다.


여러 날이 지나고 다른 시험을 보는 날이었을 것이다. 답안을 다 채우고도 시간이 제법 많아서 다른 곳을 응시하려다 그년에게 의심을 살까 싶어 엎드리고 있었다. 눈을 끔뻑끔뻑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나는 엎드려 자는 문제학생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년의 자리로 불려 나갔다. 그동안 있던 일들을 모두 끄집어내다가 나에게 알림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나에게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학부모님이 읽으시고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알림장에는 줄 칸에 맞추지도 않은 사선 방향 정렬로 글씨가 휘날려 쓰여져 있었다. 나는 또 암담했다. 이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생각하니 수업이 머리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멍해있었다. 나는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친의 사인을 위조하였다 ^.^


다음날 그년은 알림장을 가져오라고 수업시간 중간에 나를 불렀다. 거기엔 내 눈에만 훌륭한 모친의 모조 사인이 있었다. 그년은 길길이 날뛰었고 모친께 직접 전화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다음 해인가 전근을 간 것으로 기억하고, 그 다다음해인가 학교 소풍 때 소요산역(?)에서 타 학교 선생으로 우연히 마주쳤다. 그년에게 배운 다른 아이들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목례를 했고 인사는 허공으로 날았다.


-2부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La La Land; 슈러우러쿠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