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도 신분, 두 번째도 신분, 세 번째도 신분
모든 면접이 끝나고 마지막에 들어온 senior director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현재 영주권이 있는 상태이지요?
만약 입사하게 된다면 언제부터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일이 매우 많은 상황이기 때문에 바로 합류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아뿔싸.
그랬다.
문제는 나는 아직 영주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나는 미국 영주권의 마지막 단계인 485 과정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면접을 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영주권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일을 할 수 있는 권리 즉 EAD (Employment Authorization Documnet)는
이미 발급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EAD만 있으면 문제없이 이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굳이 한 가지 리스크라고 하면 AC21이라는 조항.
AC21이란,
영주권 진행 과정에서 영주권이 나오기 전에 이직을 하기 위해서는,
485 신청 후 6개월이 지나야 한다는 조항인데,
이것도 보통 영주권을 지원해 줬던 회사가 문제를 삼는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상황이고,
또 당시 면접을 봤던 시점이 485 신청 후 4~5개월을 넘어가고 있으니,
입사 시기즈음에는 6개월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도 했다.
분명 인터뷰 전에 리쿠르터에게 현재 내 상황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의사소통 상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뭐가 중요하랴.
어쨌든지 간에,
고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내 현재 상황은 매우 복잡해 보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영주권이고
EAD고
AC21이고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금 당장,
이 회사에 와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이 필요했을 뿐.
나는 다시 한번 매니저에게 지금 현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급속도로 당황해하는 매니저의 표정을 지켜만 봐야 했다.
나는 결국 그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
'그래서 언제 올 수 있는 건데?'에 대한 명쾌한 답을 그에게 주지 못한 셈이 된 것이다.
그래도 매니저는 끝까지 나를 젠틀하게 대해주었다.
마지막 나를 보내며 했던 그의 한마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계속 'keep in touch' 하고 지내요"
그렇게 내 2차 면접은 끝이 났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 처음 면접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안되면 말지 뭐'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1차, 2차 면접을 거치면서 겪었던 고생과
또 실제로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면접을 치르고 나니,
막상 이런 사소한 이유로 오퍼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면접을 보기 전보다, 면접을 보고 나서가 더 초조했던 것 같다.
리쿠르터는 아직 내가 on hold 상태라며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이야기했고.
나는 그렇게 한 달 여를 더 행복 회로 속에서 고통받고서 최종적으로 오퍼를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 오퍼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고 억울했다.
면접도 잘 봤고, 팀에도 잘 맞을 것 같았는데,
단지 영주권 상황이 복잡하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한동안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정말 그 이유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온전히 내 실력이 문제였을 수도)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 자리로 옮기지 못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일단 제일 먼저 금전적인 측면.
만약 그때 이직을 했다면 1년 이내의 퇴사이기 때문에
입사 당시 받았던 모든 보너스들을 뱉어냈어야 했다.
게다가 AMD 주식을 일절 받지 못한 채로 퇴사해야 했을 것이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AMD에 남아있게 되면서 나는
보너스도 지켜냈고, 조금이지만 주식을 베스팅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나고 난 일이지만 그 AMD 주식이 2025년 하반기에는 꽤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브로드컴 주식은 더 많이 올랐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면접 경험 자체가 내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면접을 준비하고, 새로운 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 것 같다.
'너 정말로 지금 분야(post silicon)에서 옮기고 싶은 것 맞아?'
'지금 네가 면접에서 떠들고 있는 이야기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너는 정말 이직을 원하는거야? 아니면 분야 변경을 원하는거야?'
'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만약 그때 순조롭게 오퍼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너무나 운 좋게 쉽게 얻어버린 그 기회를 정말 그만큼이나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마 브로드컴 APD 부서는 매우 바쁜 곳이었기 때문에,
그새 또 팀에 적응해 버린 채 왜 이렇게 바쁘냐며 불평불만이나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실패했기에,
멈춰 섰기에,
나는 비로소 내가 진짜 가고 싶은 방향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앞으로 20년 넘게 남은 내 엔지니어 인생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나는 어떤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