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국까지 이제 3일 정도 남은 것 같다.
갑자기 찾아온, 심지어 코로나와 독감도 아닌, 지독한 감기 때문에 근 3일간 정신을 못 차리고 나니,
정말 이제 한국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득 오늘, 수액 주사를 맞으며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대체, 왜 미국에 가서 일하기로 결심한 걸까.
그 많은 포도당이 내 몸안을 적실 때 까지도 나는 딱히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늘 이런 식이 었다.
대책은 없지만, 욕심은 많고, 그래서 일단 하고 보는 식.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원래 그런 놈이었다는 것을.
2006년 4월.
한창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반.
담임이 갑자기 뒤 게시판에 무언가를 붙이며 말했다.
"이게 그.. 일본공대를 지원하는 게 있나 본데, 관심 있는 사람 해봐라~"
당연히, 그 말을 하는 담임도, 그 말을 듣는 학생도,
그 누구 하나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고 3 그 누구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두고,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일본공대니 뭐니 하는 걸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일 테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그 제정신 아닌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당시 대략 인서울 정도 가능할까 말까 한 수능 모의고사 성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나는 갑자기 그 일본공대가 지원하고 싶어졌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공대 시스템은, 일단, 1차로 500명을 선발하고, 2차로 150명에만 들면,
전액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의 여러 국공립 대학교 중 한 곳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멋진가. 나는 왜 이런 게 있는지 몰랐는가.
비록 영어가 조금 모자라고, 물리 2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수능 공부를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3개월 동안 일본 공대 준비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렇게 재수를 시작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와중에 1차 선발에 추가 합격으로 들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헛된 희망으로 2차 공부까지 하느라 확실하게 재수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2008년 8월.
입대하기로 했던 군대가 결국 5급이 나오고,
나는 남들이 고생하는 그 2년간 새로운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다.
마침 당시 우리 과 선배들이 많이 도전하는 변리사 시험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후기들을 보니, 정말 열심히 하면 2년 안에 자격증을 딸 수 있다고들 했다.
20대 초반에 변리사라니! 이 얼마나 멋진가.
뒤도 안 돌아보고 역삼역에 있는 한빛(이었던 것 같다) 변리사 학원에 등록했다.
물론 나의 의지는 3개월이 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변리사 공부보다 더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2011년 5월.
이때 한창 유행했던 것이,
스마트폰 붐과 함께 찾아온, 애플리케이션 기반 창업이었다.
나는 무슨 바람이 또 들었는지, 창업이라는 그 자체가 멋있어 보였는지,
학생창업 동아리를 하다가, 거기서 맘에 맞는 형과 만나 실제로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그 형이 천만 원, 내가 오백만 원... 무려 주식이 33%나 있는 사내 이사였다!
물론 그 당시 이미 잘 나가고 있던, 스타일셰어라는 서비스를 창업한, 내 동기나,
그때 막 주가를 달리던 티켓몬스터 같은 회사들처럼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회사 이름으로 특허도 내보고, 정부 계획서를 내고 돈도 받아보고, 외주 작업도 해보면서 경험을 쌓았지만, 역시 오래갈 수 없었다. 나 하나 건사할 만한 월급이 나오는 구조도 아니었고, 계속 학업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2013년 5월.
이런저런 방황 끝에, 나는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했다.
결국 전기전자 출신이니까, 내 전문성을 살리려면,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미 학부 성적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기 때문에, 대학원에서 다시 잘 세탁해 보고 싶었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학점으로는 그 어느 회사도 나를 안 받아 줄 것이라는 걸..
그렇게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반도체 설계 연구실을 알게 되고,
교수님께 인턴 자리를 요청드리기 위해 면담을 가졌다.
그리고 만약 내 다른 글을 읽었다면 이미 알았겠지만, 시원하게 거절당했다.
나에게는 교수님에게 증명해 보일 증거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 학기 재수강하던 과목들이 모두 A+를 받게 되어, 가까스로 인턴을 시작했던 것 같다.
2016년 2월.
교수님께서, 나의 논문 실적도 좋고 하니, 해외 (미국) 포닥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다.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와이프와 고민했고,
결국에는 포기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마 박사과정을 하면서 이때 가장 철이 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2019년 8월.
결국, 나의 하이닉스 산학 장학생을 포기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하기로 하였다.
이유는,
그냥 삼성전자는 1등이고 하이닉스는 2등이니까. 더 멋있어 보여서.
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2022년 3월.
미국 퀄컴에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합격해서, 곧 미국에 가려고 한다.
나는 딱히 미국에 큰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전부터 계획하던 삶도 아니었다.
그냥, 삼성전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구나 싶던 차에,
미국 퀄컴에서 일하게 된다면, 내가 더 높은 위치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일하면 더 많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한 기회를 내가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
그냥 쉽게 말해 별생각 없이 멋있어 보여서 결정했다.
일본공대가 멋있어 보였고, 창업이 멋있어 보였고, 박사가 멋있어 보였고, 삼성이 멋있어 보였던 것처럼
내 인생을 되돌이켜 다시 보니,
늘 항상 이런 결정의 순간에, 나는 늘 욕심 많고, 대책 없는 결정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왜 미국에 가서 살 결정을 했을까... 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냥 늘 인생을 그렇게 결정하고 살아왔던 놈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가서도 또 어떤 고난들과 역경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대한 내 답가로 글을 마친다.
아, 보들레르의 어린 머리를 가진 무능한 자여
그래도 이 순간을 쾌락하며 음미하거라.
비록, 몇 년 후에 너의 무지함에 한숨짓더라도
지금의 쾌락은 온전히 너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