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전히 너다

'지음(知音)'으로 시공을 초월하다

by 담우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날씨.

온 세상이 회색빛 냉기에 갇힌 듯, 중년의 어깨 위로 삶의 무게가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첫마디는 모든 어색함을 집어삼켰습니다.

"이 새끼... 죽지 않고 살아있네!"


20여 년 만에 통화된 친구와의 첫 대화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우리는 이미 젊은 날의 바로 그때, 그 시간과 공간 속으로 가 있었습니다.


인위적 시간을 뛰어넘는 순간


중년의 나이가 덧씌운 사회적 가면도, 스무 해의 세월이 겹겹이 쌓아 올린 현실의 무게도, 그 순간만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꾸밈도 가식도 없이, 그저 '그 공간에 함께 존재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타임머신 없이도 시공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인위적인 시간'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몇 시에 일어나야 하고, 몇 년 안에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식의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연은 이러한 인위적인 시간의 축적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노자(老子)의 무위(無爲) 정신처럼, 억지로 노력하거나 꾸며내지 않은 본질적인 관계는, 세월의 흐름이라는 외부의 법칙을 무력화시킵니다.


친구와의 통화는, 내가 외면했던 자연스러운 나(自然)를 강제로 소환하는 축제였습니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만드는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시간의 무게가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백아와 종자기, 무위(無爲)의 관계


지극히 자의적이지만, 이 순간의 통쾌함이 바로 백아가 종자기에게 느꼈던 지음(知音)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음은 단순히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넘어, 나의 존재 자체를 이유 없이 알아주는 경지입니다.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했을 때, 종자기는 그 소리 너머의 마음을 읽어주었습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습니다.

더 이상 '이유 없는 알아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통화 역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성공이나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짊어진 중년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저 2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서로가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관계의 가장 담백하고 순수한 목적이었습니다.


이 '꾸밈도 가식도 없는' 관계의 순수함이야말로, 淡愚(담우)가 지향하는 담(淡)의 경지입니다. 세상의 잣대와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맑고 투명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가장 진실한 나를 발견합니다.


고독한 중년에게 건네는 지음의 닻


오늘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나에게 던져주었던 고독과 무게는, 사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기준에 짓눌린 나의 그림자였습니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그 껍질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마법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나로 보아주는 순간, 나는 세상의 규율이나 역할에서 벗어나 가장 어리석어 보이지만(愚), 가장 맑고 순수한 나(淡)로 돌아갑니다.


지음(知音)은 20여 년의 침묵을 깨고 찾아와, 이 차가운 세상의 바다에 잠시나마 따뜻한 닻을 내려줍니다. 그 닻을 통해 나는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나의 근원적인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새끼..." 그 한 마디는 "너는 여전히 너다"라는 세상 가장 따뜻하고 강력한 격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