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어디에 두 발을 디디고 있을까?

눈 내린 아침의 단상

by 담우

첫눈이 내렸습니다.

세상은 고요했고,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창밖은 온통 순백의 세계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도 눈은 몇 센티미터의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도로에 내린 눈은 그 순백의 빛을 발할 틈도 없이, 바쁘게 오가는 차바퀴에 밟혀 순식간에 검은 물이 되어 녹아내립니다. 반면, 도롯가 나무 위에 쌓인 눈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름의 설경을 뽐내며 반짝입니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기도 하고, 혹은 덧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그 모습이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어디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빛깔과 무게가 달라지는 듯합니다.


존재의 자리, 인위(人爲)와 자연(自然)의 경계


문득,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과연 지금 나는 어디에 두 발을 디디고 서 있을까?"


도로 위 눈처럼 세상의 속도에 밟혀 빠르게 소멸되고 있는가, 아니면 나무 위 눈처럼 고유한 빛깔을 간직하며 존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곧 '나는 지금 인위적인 욕망과 속도에 휩쓸려 나를 잃고 있는가, 아니면 자연의 순리 속에서 나의 본질을 지키고 있는가'를 묻는 노장(老莊) 철학적 물음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환경'에 처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자(老子)는 외부의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무위(無爲)'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도로 위 눈처럼 사라지는 운명도, 나무 위 눈처럼 빛나는 운명도, 결국은 자연의 흐름 속 한 조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외부의 조건에 나의 존재 가치를 온전히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낯선 고민, 깨어나는 자각(自覺)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에 서 있겠지만, 눈 내린 아침에 그 눈을 보고 나의 존재감을 고민하는 내가 문득 낯설게 느껴집니다. 늘 익숙했던 일상 속에서, 이토록 깊은 질문을 던지는 나 자신이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낯선 고민'이야말로 스스로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생명의 몸짓입니다.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蝴蝶之夢)'처럼,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각의 문턱에 설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나의 영혼이 아직 바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아마도 지금의 낯선 고민조차도 내가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고요함 속에서 찾는 나의 본질


도로와 나무 위 눈이 각기 다른 운명을 맞는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존재가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처럼, 그들은 그 자체로 평등한 존재입니다.


나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있든, 어떤 운명을 맞이하든, 나의 본질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부의 시선이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내면의 빛을 지키는 것입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려 세상의 모든 소란을 덮어버린 눈처럼, 우리에게는 때때로 깊은 고요 속에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잣대와 욕망을 내려놓고 나만의 맑고 담백한 영혼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눈 내린 아침, 도로 위 흔적처럼 사라지는 삶 속에서도, 나만의 고유한 설경을 뽐내는 나무 위 눈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낯선 고민의 끝에서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진정한 삶의 자리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