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의 꿈

주어진 틈을 자신의 삶으로 삼았을 뿐

by 담우

길을 걷다 멈춰 섰다.
하수구 철창 아래, 이름도 알 수 없는 풀 한 포기가 빛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쇠창살은 단단했고 틈은 인간의 손가락 하나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풀은 이미 그 안에서 자기 몫의 하늘을 찾아내고 있었다.


갇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나는 늘 조건을 먼저 세고, 환경을 핑계 삼고,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한 뒤에야 한 발을 떼는 쪽에 익숙했으니까.


그 풀은 묻지 않았다. 왜 하필 여기냐고도, 언제 나갈 수 있느냐고도.

그저 주어진 틈을 자신의 삶으로 삼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저 풀을 보고 불쌍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기구한 생명, 척박한 환경, 하수구 속 잡초라고.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받은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끄러움에 가까웠다.


나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던가.

남의 시선, 비교의 눈금, 이미 정해진 성공의 형식 안에서 내 가능성을 미리 접어두지 않았던가.

저 풀은 자기 삶을 변명하지 않는다. 비좁은 철창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빛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나아간다.


삶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넓은 들판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라, 틈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시작되는 것.

우리는 흔히 자유를 '조건'으로 생각하지만, 저 풀은 제약 안에서도 충분히 살아내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도 그 장면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하수구 속에서 자기 몫의 햇빛을 건져 올리던 그 초록의 얼굴이 자꾸만 내 삶과 겹쳐 보였다.

혹시 나도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축소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철창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대로만 보고, 판단한 만큼만 살겠다는 습관 같은 것들.

오늘 이후로 나는 그 풀을 '잡초'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한 존재가 자기 방식으로 삶을 통과해 낸 하나의 완결된 생애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길을 걸을 때, 나는 조금 더 자주 아래를 본다.

혹시 또 다른 생명이 내가 미처 몰랐던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 에필로그 |

삶의 무거운 빗장에 가로막혀 숨이 가쁠 때마다 하수구 틈새로 고개를 내밀던 그 '초록의 의지'를 생각합니다. 우리를 가두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더 이상은 안 돼"라고 말하는 우리 안의 속단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틈새를 향해 있나요?


"오늘 이후로 나는 조금 더 자주 아래를 보며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