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앞두고, 마음은 천천히 정리된다

'늦가을 인생 단상' 시리즈 #2

by 담우


— 겨울을 앞두고, 마음은 천천히 정리된다



11월의 끝자락에 서면, 공기부터 달라진다.
숨을 들이쉬는 감각이 차갑고, 피부에 닿는 바람은 더 얇아진다.
가을이 남긴 마지막 흔적들이 골목 끝에서 희미하게 반짝이지만,
그 너머에서는 이미 겨울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있다.

이 계절의 문턱에서, 나는 늘 마음을 정리하게 된다.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지고, 생각의 속도도 잦아든다.
마치 내 안에서도 계절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뜨겁게 치열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아 고요로 옮겨간다.


가끔 창밖을 바라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이 낙엽을 쓸고 지나간다.
계절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저 ‘변화’가 아니라
‘정리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떠나는 방식이 그렇다.
울부짖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그저 제 때가 되면 스스로 자리를 정리하고 물러난다.
그 자연스러운 퇴장은 늘 나를 묵묵히 가르친다.
— 삶도 언젠가는 이렇게 정리되는 것일까.

50대 후반의 겨울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내 안의 낙엽들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떨어져야 할 것들,
이미 기능을 다한 생각들,
붙잡고 있어도 더는 나를 따뜻하게 해주지 않는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계절의 흐름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어쩌면 늦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화려함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을 알게 하는 용기’ 인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이 되면, 날이 금세 어두워진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길었던 빛은 어느새 짧아지고,
하루의 끝은 더 일찍 찾아온다.
그 짧아진 하루 속에서 나는 나를 더 자주 만나게 된다.
해가 빨리 지는 만큼,
내 삶의 그림자들도 길어진다.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자주 마주한다.
젊음의 계절엔 미처 보지 못했던 기쁨과 슬픔들,
그리고 그때의 나보다 훨씬 성숙해진 지금의 나.

문득 깨닫는다.
겨울을 앞둔 이 시기는
후회나 회상보다는 수용의 계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흐르는 것을 막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허락하는 일.
그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지금 나는 그 길 위에 묵묵히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무섭지 않은가?”
찬바람, 고독, 고요, 단절, 정지…
겨울은 언제나 짙은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겨울이 그리 두렵지 않아 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겨울은 차갑지만, 그 속엔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힘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눈 속에서 나무는 자기 생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땅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다음 생을 위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겉으로는 멈춘 듯 보이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는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되자
내 마음의 겨울도 어느새 두려움 대신
차분한 신뢰에 가까워졌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밤이 깊어지고, 방 안의 공기 역시 겨울로 조금 더 이동한 듯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마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말하지 못한 속마음들,
놓지 못한 욕심들을 하나씩 만져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짐한다.
“올해의 겨울은,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방식으로 보내야지.”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하지만 내 안의 시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가을이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계절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가라, 가을.
나는 이제 너를 보내고,
또 다른 한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 말과 함께, 마음 한 켠이 조금 가벼워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다.
조용히, 천천히,
내 안의 온도를 지켜가며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늦가을 밤, 나의 계절을 배웅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