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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소 Apr 03. 2018

[인도] 헤미스 가면축제에 갔다.2

망했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헤미스는 인구 300명 남짓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있는 탓에 교통도 좋지 않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라다크 최대 규모의 곰파가 있고, 라다크 최대 규모의 축제가 열린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보통 마을이 있고 그 곳에 사원이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생각되지만, 헤미스는 다르다. 헤미스는 사원 이름인 헤미스가 지역이름이 된 경우이다. 헤미스고파가 유명한 이유는 첫째로 이곳이 레 왕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남걀왕이 부탄에서 초청한 고승에 의해 지어졌으며 그 이후 남걀왕조의 지원아래 라다크에서 가장 규모 있는 사원으로 성장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헤미스가 예수님이 인도를 여행할 때 머물렀던 지역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장의 근거는 소설만큼이나 빈약하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은 러시아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여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 이야기는 널리퍼저 헤미스를 찾는 서양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니콜라스 노토비치의 이야기를 진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헤미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믿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이 헤미스라는 땅이 아주 오래전부터 영적인 공간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가면축제가 열리는 헤미스 곰파는 마을을 지나 꼭대기 까지 올라가야한다.  평소에는 한산하기 그지 없는 헤미스, 곰파의 방문객보다 라마의 수가 더 많을 때도 있는 헤미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헤미스 곰파부근에 도착하니 곰파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차 안에서10분을 기다려도 10미터도 올라가지 못했다. 차가 거의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으니 베테랑 운전기사의 결단으로 결국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게 되었다. 나는 나를 태워준 가족들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허리 굽혀 인사하고 서둘러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름 라다크의 산소농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오르막은 힘들다.      


‘아.. 그냥 집에 가버릴까...’ 입에서 본심이 흘러나왔다. 매번 어딜 갈 때마다 이 소리를 하는 것 같다.

오르고 또 올라도 곰파는 보이지 않고, 내 옆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으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아니 해발3500m에서, 충분히 깊고 크게 숨쉬어도 모자랄 판에, 매연 때문에 자꾸 얕고 작게 숨을 들이쉬고 있으니 머리가 핑핑돌고 쓰러지기 직전이다. 그런데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뒤돌아서 내려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커다란 파도에 물방을 하나가 어찌 대세를 거스르겠는가... 결국 반강제로 밀리고 밀려서 계속해서 곰파로 올라가게 됐다. 내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한 아저씨가  내팔을 꾹꾹 찌르더니 "저~기 곰파가 보인다"고, "이제 다 왔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땅만 바라보고 싶은 고개를 겨우겨우 올려서 앞을 보았다. 나에게는 희망이 필요했다.  분명 곰파는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건 곰파 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나를 긴장시키는 그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헤미스 곰파 안에서부터 밖으로 이어진 빨갛고 까만 선. 하지만 이건 선이 아니지. 사람들이었다.


개미의 행렬을 본적이 있는가? 의자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내 신발 옆으로 까만 선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그 선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드는 거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자세히 보면 눈곱만한 개미 수천마리가 줄줄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와.. 망했다. 이건 진짜 망한거다. 망했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완전 뭐 된거다.’

혼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보다. 나에게 앞을 보라고 말한 아저씨에게 어이없음을 어필하기 위해 눈을 마주치니 아저씨가 흐뭇하게 웃는다.     


위기의 순간이면 역시 뇌는 이성을 되찾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 여기 줄 서있는 사람들과 이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내가 좋은 자리를 잡기는커녕 곰파 안으로 진입만 할 수 있어도 성공이다.

헤미스 곰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이 난리 통에 입장권 판매는 포기한 것 같았다. 입장권 까지 사야 했다면 정말 아수라장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꼴 이었을 거다.     

곰파에 다가갈수록 많아지는 사람들로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힘겨웠다. 겨우겨우 곰파 안에는 들어갔으나 예상대로 이미 곰파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방황하는데, 이상하게도 가면극이 시행될 깃대 주변의 광장과 곰파 안으로 이어진 통로계단(회랑으로 이어지는 부근) 쪽이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저기가 내가 가야 할 장소라 생각되어 계단을 열심히 올라갔다. 겨우겨우 계단 끝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최대한 몸을 벽에 붙이고 바퀴벌레라도 된 마냥 몸을 움추리고 있었다. 광장이 한눈에 내다 보이는 나름의 명당을 잡았다는 생각에 실실대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붉은 옷자락. 한 라마가 다가 오더니 계단에 있으면 안 된다고 내려가라고 한다.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일어나지도 않고 옆으로 삐져나오지도 않고 여기 이끼처럼 붙어 있겠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냈다. 라마는 한번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고선 내 옆에 사람부터 계단에 있는 사람 전부 내려가도록  만들었다. 나와 앞에 있던 72세의 영국인 할머니는 이 자리에 남게된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대해 기쁘게 이야기 했다. 아… 역시 오늘 운이 트이는가 보다. 라고 또다시 생각한 순간 이었다.               



하지만 인생사 세옹지마라 했다. 섣부른 결론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왜 진짜 시작은 축제가 시작하고 나서 부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락 콘서트에 가도 사운드체크를 하는 동안에는 여유롭던 공간이 밴드가 등장하는 동시에 압축기에 들어온 것 처럼 밀착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영국에서온 할머니에게 영국 밀크티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물어보니 할머니는 인도에서 먹는 밀크티가 더 맛있다고 말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한참을 기다리니 맞은편에 린포체가 나오셨다. 헤미스 곰파는 전통적으로 린포체가 사원의 주지가 된다.


린포체가 상석에 자리잡자 음악과 함께 가면극이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은 가면극을 수행하는 라마들이 준비를 하고 무대로 등장하는 통로였다. 그래서 이쪽에 사람이 있지 못하게 한 것이었는데 (내가 있던 곳은 계단 옆쪽 회랑으로 연결되는 부분으로 통로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가면

극이 시작하니 통제 불능의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은 빈 공간이 있으니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그리로 밀려들어 온 곳 같다. 어느새 내 주변을 사람들이 두 겹, 세 겹 둘러쌌고 그때부터 가면극보다는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됐다. 항상 그렇다. 시작하기 전까지는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몸으로 배웠다.          




헤미스 가면축제는 2부로 이루어졌는데, 이 가면극이 내용과 종교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 눈에는, 무한 반복의 춤과 음악이다. 그러다보니 1부가 절반 정도 끝날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2부가 시작하고 나서는 처음 인원의 1/3정도 밖에 남지 않았었다. 외국인과 인도 관광객은 2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사투는 초반 2시간 동안에 이루어 졌는데, 아까 말한 그 개미의 행렬이 작은 유리 상자로 이어지고 있었고, 유리병 속에 갇혀 차곡차곡 쌓인 개미 중 가장 밑바닥 유리병가장자리에 눌려있는 한 마리가 된 것 같았다. 2시간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등이 가벼워 졌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헤미스를 떠나고 있었다.     


헤미스 가면축제에서는 인도의 그 어느 지역보다(푸쉬카르의 낙타축제를 제외하면) 많은 사진덕후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사진덕후들의 세상이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그 화려한 색에 있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가면과 화려한 색의 의상. 그리고 곰파라는 종교적 의미가 합해지면 그 어디서도 찍을 수 없는 피사체가 나타난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지만, 라마들이 대기 하고 있다가  등장하는 출구 쪽에

있던 나는 라마들이 무대에 나가기 전의 긴장한 모습과 무사히 춤을 마치고 와서도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긴장을 유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그대로 무대 장막뒤의 모습을 본 것이다. 과연 단순한 춤이 아니라 종교의식으로써 이런 거대한 행사를 한다는 것이 부담이자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가면극을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 축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였다. 가면극을 바라보는 라다키들은 진지하게 극에 임하는 사람과 가족 나들이를 온 듯 쉴새 없이 떠들고, 미리 싸온 음식을 먹으며 즐기는 사람들 두 부류 였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동자승 역시 다른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겨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동자승이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로 칭얼 거리자 가족도  아닌 라다크 할아버지와 다른 (리시케시 출신의)인도여자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동자승을 안아주고, 달래주고. 이것저것 간식을 꺼내주며 어린라마를 달랬다. 보기 드문 관경 같았다. 이렇게 중요한 종교행사에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하지만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써 진지한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아이로 대하는 모습은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종교가 종교가 아닌 생활의 방법인 것 같이 느껴졌다.      

지겨웠지만 중독성이 있는 가면극을 결국 나는 2일 동안 전부 봤다.  첫째 날 그 많던 사람의 무리는 온데간데없고, 둘째 날은 첫째 날의 반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 첫날은 혼자 다녀오고 둘째날은 다른 사람과 같이 갔는데, 첫째 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에 꼭 거짓말쟁이가 된 느낌이었다. 둘째 날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다른지역에서온 인도 관광객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가면극의 무대 바로 앞 가장 좋은 자리는 온통 관광객들 차지해였는데 오늘은 무대 근처 자리 대부분이 라다키였다. 나는 첫날은 500루피 기부를 해야 앉을 수 있었던 자리에(그리고 그 자리역시 내가 갔을 때는 이미 관광객들로 꽉 차 있었다.) 둘째 날에 한 라마의 허락으로 아무런 금전적 요구 없이 앉을 수 있었다. 오늘 그 자리는 텅텅비어있었다.
1부와 2부 사이 막간에 짜이를 마시러 나갔는데, 기부금 명부를 가지고 곰파 입구에서 기부금을 받는 라마가 있길래 200루피를 건냈다. 좋은 자리에서 편하게 2일째 축제를 즐길 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이유가 분명한 꺼림직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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