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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소 Apr 08. 2018

[인도] 판공초-라다크에 갔다.2

초모리리와 판공초 한 곳만 다시 간다면 판공초에 갈꺼다.

판공초에서의 첫째 날 밤은 예상대로 비가 쏟아졌다.


둘째 날.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일찍 눈이 떠졌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과 마주 쳤다.


분명 7월의 한여름. 그런데 저 멀리 산이 하얗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처럼 산이 반짝이고 있었다. 판공초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니 눈이라기보다는 얼음 가루가 판공초를 둘러싸고 있었다. 분명 어제 저녁에는 쌀쌀 했지만 파카를 입을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다. 판공초는 소문만큼 춥지 않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지만 얇은 긴팔에 면으로된 집업자켓 하나 걸치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춥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날씨에 눈이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한숨 더 자고 나와야 하나?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 눈인지 아니면 내 눈이 잘못된 건지 확인하고 싶어 잠에서 깬 그대로  산 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다 깨달았다.

여기는 라다크...
30년 도시 생활 경험으로 체득한 원근감은 의미가 없었지...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원근감에 적응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해서 걸어가다가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하면서도 발길을 집으로 돌리지 못했다.         

 

메락은 정말 작은 마을이라 크게 둘러볼 것이 없다. 하지만 그 크게 둘러볼  곳 없는 작은 마을이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어기적 어기적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호숫가에 가만히 서 있으면 고요하고 고요한 판공초를 홀로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에  괜히 가슴이 설랜다. 이번에도 사람을 밀어내는 나의 귀한 재주는 나와 같이 간 두 명의 한국인을 제외한 다른 관광객을 메락에서 밀어냈다 보다. 정말 귀한 재능이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해가 완전히 뜨기전 판공초의 색도 보고 싶어서 호수 근처로 다가갔다. 약간 어두운 코발트  파랑의 호수가 태양의 높이, 빛의 양에 따라 투명한 물망초 빛 파랑으로 변하는 것은 봐도봐도 신기하다.



한참 호수를 바라보고 손을 담갔다가 차가움에 놀라고 괜히 노래도 흥얼거리고  혼자 이것 저것 하며 시간을 보내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반짝 하얗게 빛이나던 산이 어느새 라다크의 흔하디 흔한 붉은 색의 산으로 돌아가 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눈이 쌓이고 해가 뜨면 녹는 것인지… 내일도 확인해 봐야겠다.


홈스테이로 돌아가기 전, 판공초 물을 손으로 떠 혓바닥에 찍어 보았다. 짜다. 바닷물처럼 짜지는 않지만 혀로 짠맛이 느껴졌다. 쩝쩝... 갑자기 입맛이 도는 것이 배가 고파졌다.       




“이제 판공초에서 뭐 할까?” 아침도 먹었고 호수도 한 바퀴 돌았고 마을도 둘러보았다. 이제 무얼 해야할지...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일단 홈스테이 집 주인에게 물었다.     


“우리집 뒤에 언덕 보이지?올라가는데 별로 힌들지 않아. 거기 올라가면 판공초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어”

마을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는데,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고의 판공초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신난다!!! 해가 가장 강한 시간, 판공초가 가장 아름다울 시간에 올라가야겠다.     


언덕으로 가는 도입은 정말 힘들지 않았다. 숨 도차지 않았고, 생각보다 빨리 정상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덕을 올라가다 보니 아이들이 바닥에 모여 앉아 과자봉지에서 생초록색의 뭔가를 꺼내 먹고 있었다. 다가가서 슬쩍 봉투 안을 쳐다보니 아주 작은 완두콩꼬투리가 한 움큼 들어 있었다.


삶지도 않은 생콩을 까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니, 내가 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작은 손으로 내게도 콩꼬투리 한주먹을 건 낸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생콩인데도 풋내도 안 나고 달달했다. 더 먹고 싶은데 과자봉투가 홀쭉한 것을 보니 차마 더 달라고는 못하겠다. 아이들 옆에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할머니에게는 아이들이 먹던 콩을 외국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이 기특 했나보다.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신 모습을 보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카메라를 양손으로 살짝 올렸다가 내리면서 “오케이?” 하고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사진 찍어도 되나요?’라는 의미였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시 정상을 향해 가는데 이번에는 남자아이 둘이 경사에 튀어나온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뭔가 RPG게임 속에 있는 느낌이다. 미션을 주는 <동네 아이 1> 이런 느낌이다. 두명의 남자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라다키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내 등을 쿡쿡 찌르더니 갑자기 엄청 난 속도로 언덕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있던 터라 아이들을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고산지대의 아이들은 위대하다.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저렇게 몸이 가벼울 수 있는 거지? 이전에 레에서 틱세이 곰파를 가는데 차도 가장자리에 어느 학교 육상부 인 것 같은 아이들 십 여명이 운동복을 입고 줄을 서서 뛰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정말 고산지대의 산소레벨을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헉헉대며  반은 기어서 네발로 정상에 도달했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보인 것은 오토바이 한 대였다. 두 명의 인도인이 이곳까지 오토바이를 끌고 올라온 것이다!!! 인도인답게 선글라스에 가죽자켓 그리고 반짝이는 바이크까지 볼리우드 스타가 따로 없다. 이 인도인들은 한참 전에 뛰어 올라온 두 명의 아이들을 판동초를 배경으로 앉혀 놓고 여러 포즈 지도를 해주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일단 ‘모든 사진은 가능한 한 물어 보고 찍자’ 주의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물어 보고 사진을  찍는데, 포즈 부탁은 한 번도 하질 못했다.
 역시 인도인 대단하다.



아이들은 카메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오토바이에는 무한한 애정을 보였다. 인도인들이 가끔 매너도 없고 이기적일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지만, 아이들에 만큼은 대부분 친절하다. 이 인도인도 억지로 아이들에게 포즈를 시키며 사진을 찍어 댔지만 아이들이 오토바이에 관심을 보이니 오토바이에 태워주기도 하고 오토바이와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썬글라스도 벗어서 씌워줬다. 이것저것 자상하게 설명도 해주고 참 친절했다.     




인도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최초의 목적이었던 정상에서 내려다본 판공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단언 컨데 2016년 내가 본 라다크 풍경 best3안에 든다고 말하겠다. 물론 맑은 날 한정이다. 판공초의 물은 강렬한 태양이 없으면 판공초만의 색을 내지못한다. 물망초 빛 파랑의 판공초와 초록으로 뒤덮인 메락마을의 색이 정말 상상하던 판공초 같았다.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만 아니었으면 이곳에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싶었다.          



메락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지만, 나를 판공초에 다시 불러들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2017년 다시 판공초에 간 이유는 홈스테이 주인이자 너무나도 자상한 나의 친구 때문이다.



그녀는 나이는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어째서인지 나를 자신보다 동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자만 나는 그녀에게 내 나이를 고쳐주지 않았다.


20살의 이 어린 친구는 작년 라다크의 다른 마을에서 메락으로 시집 왔다. 이제 겨우 한 살인 귀여운 딸이 있는데, 이 아기는 태어난지 백일도 되기 전에 호흡에 문제가 생겨 레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하다.

 그녀가 살던 동네는 레와 비슷한 고도에 있던 곳으로 자신도 판공초에 와서 경미한 고산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데, 겨울이 되면 라다크 최고의 도시인 레에서 지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에가면 이곳에서큰 살 수 없는 것들, 할 수 없는 것들을 전부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집 사람들만 레에 가냐고 물으니 판공초 메락의 사람들은 가축을 돌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레나 다른 낮은 지역에서 겨울을 보낸다고 했다. 어린 집주인은 도시를 좋아하고, 와이파이를 좋아하고, 낯을 가리기는 하지만 한번 입이 열리면 멈출줄을 모르는 수다쟁이 20살 소녀였다.     


이 친구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인도에 있는 2년동안 유일하게 물갈이라고 할 수 있는 증상이 나타난 것이 바로 판공초 였는데,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인도 판공초에서 장마철에 서울 관악산의 약수터를 폐쇄하는 이유도 몸소 체험했.)


판공초에 도착한 날 밤에 비가 쏟아졌다. 밤새 지붕에서 방 안으로 물이 똑똑 떨어져 방안에 양동이를 받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홈스테이 옆쪽에 있는 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떠먹었다.  그리고 나는 물갈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3~4시간 정도 배가 아프고 2~3번 설사를 한 것 가지고 물갈이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아무튼 배앓이를 했다.

한국에서는 배앓이를 자주 하지만 인도에서는 한 번도 배앓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나더니 보이지 않는 손이 장을 마구 주물러대는 느낌이었다. 가지고 있는 약도 없었고, 혹시라도 내가 함께 놀러온 다른 두 사람이 나를 신경쓰느라 불편해 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홈스테이 호스트가 약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갑자기 배가 아픈데 혹시 약 있어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짖더니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물으며 신속하게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덥석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집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녀는 나를 이 마을의 암치(티베트 전통 의사)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 암치와 얽힌 이야기가 한 가득인데 2017년 인도이야기에서 풀어보려한다.)       


암치는 없었지만, 암치의 부인에게 약을 받았다.

다시 이 친구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약 먹을 물을 끓여주고 식혀주고 내가 춥지 않을까 담요를 더 가져다주고, 계속해서 내 상태를 체크하면서 신경써주었다. 이 친구, 스탄진은 정말 나이만 어리지 언니나 다름없었다.



판공초에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누군가 나에게 판공초와 초모리리 중 어디가 더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초모리리라고 대답 할꺼다. 하지만 둘 중 한군데만 다시 갈수 있다면 어디를 가겠냐고 묻는다면 판공초라고 대답할 꺼다.     


2017년에도 초모리리는 가지 않았지만 판공초에는 다녀왔다. 판공초에 다시 간 이유는 스탄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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