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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소 Aug 06. 2018

[파키스탄]2018년 훈자- #4.라카포시와 트레킹

결국엔 카리마바드

한국에서 파키스탄에 갈 준비를 할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파키스탄에 관한 무시무시한 뉴스들도 아니고, 그 뉴스를 먹고 성장한 소름돋는 소문들도 아니었다.


내가 파키스탄에 갈 때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트레킹' 이었다.



나는 트레킹을 정말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면 가이드도 포터도 일행도 없는 홀로하는 트레킹을 좋아한다. 혼자하는 산행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더이상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될정도로 충분히 많이 들었다. 그래도 홀로 하는 트레킹을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조언을 받아들여 누군가를 고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아무튼 파키스탄-훈자는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는 않지만,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이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멋진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훈자에가면 트레킹을 한달은 해야지!!! 한국에서 생각한 훈자 계획이다.



하지만 내가 카리마바드 이외의 장소에서 잠을 잔 것은 중국 국경을 넘기전  단 하루 뿐이었다.    



나는 트레킹을 가지 않았다. 하루동안의 짧은 하이킹을 했을 뿐이다.



 훈자에 도착하고 5일째이던가 7일째 이던가.... 인도에서 부터 안면이 있었던 한 한국인 동생이


"누나 라카포시 가지 않으실래요?" 라고 물었다. 라카포시가 뭐더라?? 훈자에 도착한 첫날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나를 게스트 하우스 옥상으로 데려가 카리마바드를 둘러싸고 있는 피크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줄때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훈자 여행의 중심 카리마 바드는 5개의 스노우피크로 둘러  싸여있다.  카리마바드에서 가장 중요한 울타르 피크 그리고 6000m가 넘지만 송곳 같이 날카로워 눈이 쌓이지 않는 레이디스핑거,  카리마바드를 마주보는 라카포시와 디란, 카리마바드의 왼편에 있는 골든픽.  



그중 카리마바드에서 볼때 가장 웅장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 라카포시다.


내가 트레킹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장기간 트레킹을 간다면 일행이 있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2~3일 정도야 뭐든 좋다. 거기다 이 동생은 시간이 없어서 라카포시 베이스 캠프를 하루 만에 다녀와야 했다. 함께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라카포시에 갔다.


라카포시와 훈자 트레킹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본론을 빙빙돌려 한 세바퀴 쯤 돈 다음에 다시 한번 거꾸로 돌아서 본론에 도착하는 짜증나지만 자주사용하는 내 화법이 등장해야 한다.



1. 나가르.


라카포시는 훈자에 없다. 훈자가 걸쳐있는 협곡의 맞은편에 있는 나가르 라는 지역이 있다. 훈자와 나가르는  사이 나쁜 친형제들 같은 느낌이다. 지형적으로 너무나도 닮은 두 지역은 대놓고 라이벌이다. 마치 고구려에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자 자신의 사람들응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느낌이랄까?



이 비유는 굉장히 그럴싸하다. 과거 훈자와 나가르 일대를 통치하던 왕은 큰 아들에게는 훈자를 작은 아들에게는 나가르를 주어 통치 하겠끔 했다고 한다. 두 형제의 우애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른 왕을 가지고 다른 왕국이 된 훈자와 나가르는 서로를 라이벌로 여기며 성장했고 그들의 라이벌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현대 사회의 가치관에서 두지역을 보자면 두 지역간의 격차는 상당하다. 굳이 비교를 하지 않아도 훈자가 우위를 차지 하는 것이 분명하다.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던  이 두 지역의 변화는 1959년 시작된 카라코람하이웨이(Kkh)가 건설로 부터시작된다.



1986년 27년이라는 대공사끝에 완성된 카라코람하이웨이는 중국과 파키스탄을 단번에 연결했고, KKH를 따라 훈자지역이 개발 되면서 부터 나가르와의 격차는 벌어진다. 거기다 이스마일(온건적인 무슬림의 한 종파)의 수장인 아가칸의 말을 따라 훈자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훈자 사람들은 중국의 신장 지역을 여권과 비자없이 오고갈 수 있게 된다. 중국, 그리고 Kkh를 따라 유입되는 외국인 여행자들은 훈자 사람들의 영향으로 훈자는 더욱 개방적인 지역으로 탈바꿈 한다.



하지만 훈자의 라이벌로써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나가르가 최근 훈자를 바싹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나가르의 높아진 교육율과 파키스탄 관광객들의 트레킹에대한 관심의 증가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머물던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10년내에 나가르가 훈자를 넘어서는 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아무튼 라카포시 베이스 캠프를 가기 위해서는 이 나가르의 미나핀이라는 마을로 가야했다.



2.  라카포시 베이스 캠프로 가는 길은 평이하다. 평범하게 아름답고 평범하게 험난하다.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지만, 만약 우리가 중간에 후세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길을 잃었을 것이다. 험한 길은 없지만, 길이 아닌 것 같은 길이 길인 구간은 있다.


이 일대는 가축을 방목하여 키운다. 목초지에 소나 염소를 풀어 놓고 며칠을 방목한다. 그리고선 온산을 뒤져 가축을 찾아내어 다른 목초지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또 며칠뒤 온 산을 뒤져 가축을 찾아낸다.


후세인은 방목하고 있는 자신의 숫소를 찾으러 왔다. 보통 소를 찾기 위해 골자기를 2~4개정도 넘어다닌다고 했다. 후세인 학교 선생님이 이었다. 파키스탄에서 교사는 존경받는 직업이다. 하지만 월급이 매우적다. 공립학교 교사인 누자라트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 일반적으로 사립학교 선생님은 보통 월급으로 1200-2000루피를 받고, 공립학교 선생님은 25000루피를 받는다고 했다. 후세인은 자신의 큰딸이 이슬라마바드의 대학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딸을 이슬라마바드로 보내기위해 교직을 잠시 그만두고 게스트 하우스 메니저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후세인에게 나가르이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후세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후세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아버지의 막내딸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매우 반대 했다고 했다. (나가르 최초의 여자학교는 80년대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성교육이라는 것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나가르 주민들 탓에 제대로 교육을 받은 여성은 드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딸의 교육에 가장 열성인것은 딸의 할아버지, 즉 자신의 아버지라고 했다. 그는 나가르와 파키스탄을 바꿀 수 있는것은 교육의 힘이라고 말했다. 후세인과의 대화에서 후세인이 정말 좋은 선생님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교직을 떠난 그 후 매일 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를 그리워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딸이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교사일을 시작 할 것이라 했다. 후세인은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를  베이스 캠프까지 안내해 주겠디고 했고, 나는 감사히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3. 파키스탄의 산들은 신기하다. 다른 산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 골자기 하나를 사이로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 단 한바자국, 한 발거름 아래 빙하의 계곡이 펼쳐져 있다. 고개 하나만 돌아가면 마을 옆으로 빙하가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분명 훈자는 고산지대이지만, 겨우 3000m다. 만년설이 존재하기 힘든 고도임에도 빙하가 녹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라카포시 베이스 캠프나, 호퍼, 파수 모두 해발 고도가 3000m가 채 되지 않는데 말이다. 한발만 내딪으면 다른세계가 되는 것은 마치 차원이동을 하는 기분이다.


4. 베이스캠프를 향해 가던 길에 한 할아버지가 저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다가 왔다. 당나귀 고삐를 한손에 쥐고 천으로 된 가방을 메고 계셨는데,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은 속도 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손짓으로 자신의 당나귀에 타라고 했지만 나는 공손히 거절했다.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쯤에는 또랑이 있고, 목초지가 있고 돌과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있다. 문앞에 익숙한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계셨는데 아까 당나귀를 데리고 우리를 앞질러간 할아버지 였다. 할아버지가 부르길래 쫄래쫄래 또랑을 넘어 갔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짜이를 마시고 가라 했고 우리는 할아버지의 집에서 짜이와 피타를 마셨다. 할아버지는 베이스캠프에서 내려올때 다시한번 들려서 짜이를 마시러 가라고 했다. 물론 할아버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나도 당시에는 우르두-파키스탄의 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지금도 우르두를 거의 하지 못하지만..)하지만 전세계 어디나,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언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언어를 초월한 의사전달 능력이 있다.


5. 이곳에서 왠만한 사람은 다 가족이다. 한 마을 사람이면  '사촌'관계일 확률이 크다. 베이스 캠프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만난 후세인 짜이를 타준 할아버지의 조카 였다. 할아버지의 누님의 아들이 후세인였다. 할아버지는 내려오는 길에 꼭 자신의 집에 들려 짜이를 마시러 했고 우리는 다시 할아버지를 찼아갔다. 후세인은 베이스캠프에 도달하기전 잃어버린 숫소를 찾았다. 하지만 우리를 베이스캠프로 안내하고 돌아오니 숫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 30분쯤 숫소를 찾아 산을 날아다니는 후세인을 기다렸고, 후세인은 저멀리 어딘가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자신의 숫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숫소를 찾아느다음 삼촌의 오두막으로 내려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먼저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내려왔고, 놀랍게도 후세인은 우리가 도착하고 채 5분이 되지 않아서 삼촌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는 그의 숫소와 함께 산을 날아온 것이 틀림없다. 잃어버린 숫소를 찾고 할아버지의 집에 온 후세인 이 곳은 겨울이나 가끔 일이 많아 마을로 돌아 갈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임시 처소 같은 것이라 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쫄딱 젖은 몸에 따뜻한 짜이가 들어가니 몸이 노곤해지고 행복한 감정이 밀려왔다.



오전에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이 곳에서 '주소'라는 것은 의미가 없고, 사람의 '이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시 00구 00로 00 보다는 서울 00마을의 A의 아들이 더욱 신빙성 있고 신용이 있는 주소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사진을 가르켰고, 나는 그것이 할아버지가 자신의 사진을 보내달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후세인을 만난 덕분에 사진을 바로 할아버지에게 보낼 수 있었다. 몇년전 할아버지는 사냥을 갔다가 프랑스커플을 만났다고 한다. 커플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었고, 할아버지는 그때도 자신의 사진을 찍어도 좋지만, 반드시 사진을 자신에게 보내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프랑스 커플이 할아버지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어느날 할아버지의 집에는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프랑스 커플이 프랑스에서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보낸 것이었다.      




아무튼 이제 다시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훈자에서의 트레킹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결국 당일치기 22km남짓의 짧은 하이킹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기간 트레킹을 가지 위해서는 식재료와 가스 텐트까지 모든 것을 들고 올라가야 한다는 말은 트레킹에 대한 의욕을 꺽었고 그 이후 다른 외국인들과 트레킹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전부 거절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혼자서는 트레킹을 가기 힘든 상황이었고, 트레킹에 대한 열정이 있었더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트레킹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카리마바드라는 곳을 벗어나기 싫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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