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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엄마와 고사리 소풍

내년 봄에도 또

by 포공영

겨우내 생강밭을 덮고 있던 하얀 부직포를 걷어냈다. 부직포를 들추어낼 때마다 봄볕에 후끈해진 공기가 올라왔다. 다 걷어내니 누르스름한 지푸라기 이불이 보였다. 그 위에 산비탈을 거슬러 오르며 부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굵은 나뭇가지나 알루미늄 지지대 등을 올려놓았다. 산기슭에 있는 세 판 짜리 작은 밭이라 금세 끝났다.

“고사리 꺾으러 갈래?”

엄마가 물었다.

“지금도 있어?”

“그럼, 7월까지도 꺽는디.”

돌돌 말아 끈으로 묶어 놓은 부직포 꾸러미를 뒤로 하고 엄마와 나는 산으로 향했다.


나름 고사리로 유명한 마을이라 해마다 고사리철이 되면 전문 고사리꾼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곤 한다. 고사리꾼이 다녀간 직후라면 헛걸음이 될 테지만, 사나흘만 지나도 새 고사리가 땅을 뚫고 쑤욱 올라오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는 마늘과 단호박 농사를 짓느라 산에 오를 짬을 낼 수 없었다. 산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음에도 말이다. 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두 갈래로 나뉜 길이 보였다. 예전에 고사리를 꺾으러 다닐 때 나는 언제나 오른쪽 길로만 다녔는데, 엄마는 왼쪽길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함께 고사리를 꺾으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쪽에 고사리가 많었어.”

엄마 말처럼 스무 걸음도 채 안 걸었는데 솜털이 난 갈색 고사리가 한두 개씩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자라 솜털은 사라졌지만 연두색으로 변한 고사리도 있었다. 근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참나무와 개암나무의 어린 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자라고 있었다. 엄마는 봉분이 깨져 황토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무덤의 주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5월 초라 새잎은 연한 연두색을 띄고 보드라웠다. 누가 이미 한 차례 꺾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고사리가 많지는 않았다. 한 줌 정도씩 꺾은 우리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엄마의 보라색 일모자에 담았다. 엄마가 앞서며 말했다.

“옛날에는 혼자서 많이 꺾으러 다녔는데, 요즘엔 무서워서 혼자 못 와.”


한 사람 정도가 겨우 걸을 만한 좁은 길이 이어졌다. 그 길가에 어린 단풍나무들이 아기 손 같이 앙증맞은 작은 잎을 펼치고 있었다.

“이게 다 단풍나무여, 윗집 부산 아저씨가 팔겠다고 저기다 심었는디 거그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여기도 많네.”

엄마가 가리킨 곳을 보니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늠름한 단풍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부산에서 이사 왔다고 해서 ‘부산 아저씨’라고 불렸던 아저씨는 3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산속의 단풍나무가 팔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비탈을 오르기 시작하자 좁은 산길이 사라졌다.

“여기가 전에는 고사리가 엄청 많았는디 어째 읍네.”

단호박 농사를 스무 해 넘게 지었으니 엄마는 20여 년 만에 그 길에 들어선 거였다. 산도 그 사이 스무 살을 더 먹었고 여러모로 변했다.

“이게 산초나무여, 새들이 열매를 먹고 여기다 똥을 쌌나 보네.”

“산초가 추어탕에 들어가지.”

엄마가 산초나무 잎을 만지며 말했다. 내 허리 아래정도까지 자란 산초나무에 연두색 꽃이 피어있었다.

“이건 오가피나무, 잎이 다섯 장이지?”

고사리는 다 어디 가고, 빽빽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에서 산초나무, 망개나무 그리고 오가피나무 등이 고만고만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무에 가려 하늘도 안 보이고 숲은 어둡기만 했다. 그래서 엄마는 무섭다고 한 걸까?


고사리는 햇빛을 받아야 한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지니 햇살이 나무 아래 땅까지 비집고 내려오기가 수월치 않았다. 보통 고사리가 나는 곳에는 작년에 고사리가 자랐던 흔적이 있다. 다 자란 고사리가 말라 밀크 커피색이나 연갈색을 띠고 있으면 그 주변에서 햇 고사리도 볼 수 있다. 엄마가 고사리를 꺾었다던 그곳에서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국 웨일즈에 갔던 첫 해 나무 하나 없는 바닷가 기슭에서 고사리 천지인 곳을 발견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거대한 고사리 밭을 보며 반가움에 소리 지르며 꺾으러 들어갔었다. 길고 굵은 고사리는 아주 실했고, 우리는 가져올 수 있을 만큼 힘써 꺾었다. 영국인에게는 흔하디 흔한 양치식물이자 독초라 하는 그것을 우리는 기숙사에서 삶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너무 오래 삶아 흐물흐물해졌고 말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다 버려야 했다. 한 친구는 그게 아쉬웠는지 두고두고 내게 잔소리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으니 어린 고사리를 볼 때면 내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헛걸음한 엄마와 나는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와 두 갈래 길이 있던 초입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넓은 오른쪽 길에 들어섰다. 전에 내가 고사리를 꺾던 곳으로 가는 길은 넓지만 경사가 있어 힘이 들고 금세 숨이 찼다. 길의 오른편은 소나무를 캔 자리에 심은 백합나무가 몇 년 사이 엄청 자라서 백합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도 전에는 고사리가 많았었는디.”

엄마가 말했다. 정말 그랬었다. 소나무를 캔 빈자리에 햇빛이 가득했을 때, 고사리도 지천이었다. 넓은 길 위의 하늘도 안 보였지만, 나뭇가지와 잎 틈새로 햇살이 새어 내렸다. 길 중간에 군데군데 패인 곳이 있었는데 멧돼지가 파 놓은 모양이었다. 엄마가 산이 무서워진 건 멧돼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산은 고라니와 멧돼지 그리고 뱀이 많아졌다고 한다.

“아이구, 힘들어, 나는 더는 못가겄다.”

무릎이 안 좋은 엄마는 거친 숨을 내쉬며 그만 내려가자고 했다.

“엄마는 먼저 내려가. 나는 저 위쪽까지만 가보고 갈게.”


엄마와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매번 가던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오후 햇볕이 환하게 쏟아져 내리는 그곳도 무덤이었는데 두 기가 같이 있는 쌍무덤이었다. 멀리서도 어린잎을 돌돌 말고 서 있는 어린 고사리가 보였다.

“엄마아, 여기 고사리 많아!”

나는 내려가고 있는 엄마에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두어 번 외쳤다. 그러고는 고사리가 담긴 엄마의 일모자를 내려놓고 꺾기 시작했다. 이게 고사리 꺾는 재미지, 마른 잔디 위를 꼼꼼히 살펴가며 부지런히 꺾었다. 1,2분 만에 다발이 된 고사리를 일모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가끔씩 보이는 취나물도 뜯었다.

“많으네. 여기는 사람들이 안 왔다 갔나 보네.”

“엄마, 다리 아프다며?”

잠시 쉬면서 좀 나아졌는지 엄마가 어느새 올라와서 꺾고 있었다. 엄마는 두 기의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도 말해줬다. 무덤 주위는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었지만, 폭우에 무너진 것인지 그곳의 무덤도 윗부분이 깨져있었다. 우리는 무덤 주위를 두어 바퀴 돌면서 꺾었다. 엄마의 일모자가 제법 묵직했다.

“엄청 많으네, 두어 번은 먹겄네.”

엄마의 목소리에서 만족감이 느껴졌다.


내려오는 길에 멧돼지가 파 놓은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청개구리를 보았다. 겨울잠에서 막 깬 모양이었다. 나는 그 생명체가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모처럼 엄마와 산에 오른 것이 소풍가는 날마냥 즐거웠다. 잠깐이었지만 엄마의 과거 이야기 속을 걸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내년에도 함께 고사리를 꺾으러 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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