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 게일에게 한국어는 ‘사랑’

엄마는 영국인, 딸은 한국인

by 포공영

몇 해 못 본 사이 회갈색 머리는 완전히 세어서 진줏빛으로 변해 은은히 반짝였다. 게일에게는 그게 더 어울려 보였다. 나이 들어 보인다기보다는 외려 우아해 보였다. 그의 양녀도 함께 왔다. 게일의 SNS 프로필에 올라가 있는 사진처럼 짧은 머리였지만, 몸이 아파 그런 건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기에 서둘러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쓰는 영어는 떠듬떠듬 더디게 나왔다. 그런 상황에 익숙한 게일은 능숙하게 알아들으며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양녀가 사는 정읍에서 며칠 머물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올라온 참이었다.


서로의 안부 인사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이어졌다. 게일은 지난 몇 년간 책 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첫 번째 책은 전자책으로도 나와 해외에서도 쉽게 살 수 있어 나도 한 권 구매했다. 게일에게 문장이 시처럼 아름다웠고 내용에 감동했다고 하니 고맙다며 수줍게 웃었다. 출판사나 다른 독자의 평도 나와 다름없었는지 좋았다고 했다.


우리가 만나기 얼마 전에 새 책이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나온 참이라고 했다. 나중에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받아 보니 첫 책과 다르게 제법 두터웠다. 어느덧 어엿한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게일이 신기했다. 그는 내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내게도 꼭 글을 써 보라고 당부했다. 나도 충분히 책을 쓸 수 있다는 격려와 함께 요즘 책의 추세도 알려주었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것 중 하나가 ‘브런치 작가’이다. 다음에 만날 때엔 내 책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영국 웨일즈에서 게일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게 딱 10년 전이었다. 그때 게일과 함께 브리짓, 데이브 이렇게 세 명의 학습자가 있었다. 게일은 양녀를 위해서, 브리짓은 한국인 남편을 위해서였다. 데이브는 나중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으니 다 한국과의 인연이 남달랐다. 기초인 ‘가나다’부터 가르쳤지만, 수업 시간이 적어서 그랬는지 나이가 있어서 그랬는지 열정만큼 늘지는 않았다.


수업 때마다 한 번씩은 머리에 양손을 얹고는 잘 안 외워진다고 탄식하곤 했던 게일이, 그때로부터 나아졌는지 어떤지 ‘감사합니다. 괜찮아. 맛있어요.’ 등의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짧은 말로는 가늠이 어려웠다. 줄곧 영어로 얘기해 왔던 터라 몰랐는데, 곁에 있는 양녀를 위해서인지 본인이 알고 있는 한국어를 최대한 말하려 애썼다. 양녀와는 나날이 정확도가 올라가고 있는 스마트폰의 번역기를 사용해 소통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한때, 양녀가 영어를 배우는 것이 빠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말 배우기는 쉽지 않다. 언어는 제아무리 현지에 산다고 해도 자연스레 능숙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나름 오래 살았던 내가 산 증인이다.


게일과 양녀, 둘이 함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영국인 엄마는 웨일즈에, 한국인 양녀는 전라도에 살고 있어, 많아야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 전화나 영상 통화에도 한계는 있을 것이고.


게일은 외국어 울렁증이 있다. 젊은 날 북아프리카에서 3년 넘게 살면서 아랍어를 배우려 애썼지만, 도무지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영어가 서툰 외국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줬고, 속된 말로 개떡과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게일은 상대의 수준에 맞춰 말의 속도를 조절했고, 온전하지 않아 비워진 상대의 문장에 적절한 단어를 찾아 얹어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양녀와는 인사하면서 통성명을 했지만, 그의 한국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저 게일이 부르는 대로 ‘레이첼’이라고 불렀다. 레이첼은 세터민이다. 게일은 일 때문에 자주 한국을 오갔다. 그러면서 북한에도 관심이 생겼고, 한 모임에서 레이첼도 만났다. 게일은 미혼이었고, 레이첼은 가족이 없었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좀 놀랐다. 정식 입양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엄마와 딸이 되어보자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말로만 들었던 양녀와 함께 앉아있는 게일의 모습은 처음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지난 10년이라는 세월은 한 겹 두 겹 쌓여 둘 사이의 거리를 촘촘하게 메워오고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게일은 아랍어도 한국어도 실패했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울 때와는 전혀 다르게 또 다른 언어인 ‘엄마의 말’은 잘 배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는 엄마처럼 눈으로 말하고, 손길로 말하고, 포옹으로 말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또 듣는다. 엄마 게일에게 있어 한국어는 ‘딸을 향한 사랑’이었다. 게일과 레이첼은 영국과 한국에서 따로 일 때도, 가끔 서로의 공간에서 같이 지내면서도 가족으로 영글어 가는 중임을 느낄 수 있었다.


금세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직접 그리고 편집해서 만든 달력을 선물했다. 그림에는 손 글씨로 쓴 한국어 성경 구절도 있었다. 유난히 작은 나는 영국인치고도 유난히 큰 게일과 어정쩡한 자세로 얼싸안으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게일의 짐을 나눠 든 레이첼이 카페 앞 대로변에서 택시를 불러 세웠다. 레이첼은 내게 꾸벅 인사를 했고, 게일은 손을 흔들며 택시에 올랐다. 나도 손을 흔들며 모녀를 배웅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8. 엄마와 고사리 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