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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를 생각해 줘서 고맙구나

Thank you for thinking of me

by 포공영

우리말의 ‘사랑하다’는 ‘생각하다’에서 왔다고 한다.


서너 달에 한 번씩은 영국인 스승 롤랜드가 생각났다. 선생님이 일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안부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 어느 새부터는 습관이 되었다. 영국시간 아침 7시 정도에 맞춰 전화를 하면 선생님은 낡은 엔진에 기름칠하듯이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받는다. 선생님의 “Hello!”에 나 역시 “Hello, Rowland!”라고 대답한 후 내 이름을 밝힌다. 선생님이 보청기를 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시작한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나면 선생님은 으레 “지금은 어디에 있니?”라고 묻는다. 내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터라 확인차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안 그래도 네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인데 전화를 주었구나. 널 위해 기도하고 있었단다.”라고 말한다. 전화를 할 때마다 매번 듣는데도 항상 기분이 좋은 말이다. 지난 몇 달 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오랜만의 영어 통화에 내 집중력이 떨어져 갈 그때, 나는 건강하시라는 말을 전하며 이제 그만 통화를 마치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선생님은 “Thank you for thinking of me.”라고 대답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날 생각해 주고 연락해 주어 고맙다는 말은 전화뿐만 아니라 이메일의 답장에도 늘 빠지지 않는 선생님의 말이었다.


선생님의 이 말은 시나브로 내 말이 되어 나도 연락해 오는 이들에게 “날 기억해 주고 연락해 주어 고마워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해외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고국의 친구나 지인에게서 점점 잊히는 존재가 되어갔기에 빈말이 아니었다. 귀국한 지금도 모처럼 연락 주는 이들에게 늘 잊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선생님이 여든이 되던 해, “80은 처음이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라고 했었다. 그 말에 나도 장단을 맞추며 나도 그해의 내 나이는 처음이라 나도 그렇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의 그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생히 다가왔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도 깊어지고 마음에 여유도 생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서툴고 잘 모르겠다.


선생님이 여든 중반에 접어들면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내 이름을 여러 번 말해야 알아챘다. 그즈음 선생님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얘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마지막 통화는 일본에서였다.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한 거였는데, 통화를 하면서 직감했다. 앞으로는 선생님과 통화하기가 어렵겠구나...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하면서 대화 속에서 헤매기도 했다. 알츠하이머는 선생님의 기억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한국에 돌아온 뒤 선생님이 가족도 친구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져,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독히도 요양원을 싫어했다는 선생님은 그곳에서 꼬박 3년을 채우고, 먼저 떠난 앤 사모님 곁으로 가셨다.


영국에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은 수원의 아주대 근처에서 모이기로 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나는 수원행 버스에 올랐다. 정류장을 잘못 내려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옛 생각을 하다 보니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곳에서의 추억, 영국 웨일즈에서 모처럼 눈이 오던 날, 학교 휴교령에 신난 아이들이 언덕이 있는 공원으로 나와 신나게 눈썰매를 탔었지. 반나절도 못 가 눈이 다 녹아버려 아쉬워하는 발걸음 옆으로 키 작은 보라색꽃 크로커스가 빼꼼하고 얼굴을 내밀었고.


추도 모임 약속 장소에 들어서니 40여 명의 사람이 아담한 채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선생님의 사진 몇 장이 커다란 스크린에서 차례대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과 인사를 나누며 앉았다. 절반쯤은 아는 얼굴이고 나머지는 초면이었다. 몇몇은 선생님을 만난 본 적은 없지만 가족에게 익히 들어 같이 온 이도 있었다. 추모 예배를 시작하며 누군가 만든 선생님의 영상을 보자니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비로소 조금 실감 났다. 은빛 머리에 빨간 체크 남방과 검정 훌리스 재킷을 입고 어깨에는 검은 바탕에 빨간 포인트가 있는 배낭을 걸쳐 맨 채, 제자 여럿과 폭포가 있는 산을 오르는 선생님의 옆모습에서 그가 늘 말해왔던 삶이 스며 나왔다. 여든을 지나가는 삶이 낯설지만 그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고, 열정을 다해 그 꿈의 길을 걸어갔다. 식지도 늙지도 닳지도 않는 그 마음이,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나는 가장 닮고 싶었다.


1부 추모 예배가 끝나자 2부가 시작되었다. 선생님과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 사람들이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서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울고 웃었다. 내가 알던 선생님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같았다. 그 사랑이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겨 한 자리에 모았다.


선생님 얘기로 가득한 그곳에 있으니 늘 배웅하던 선생님의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웨일즈를 방문하고 떠나는 날이면 그 시간이 몇 시든 상관없이 버스 터미널로 혹은 기차역으로 나와서 인사를 했다. 한 번 꼭 끌어 안아 준 후 멋쩍게 웃으며 잘 가라고 말해 주던 선생님,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기에 직접 얼굴을 보며 배웅하기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폭설 속을 뚫고 전국각지에서 온 제자가 함께 모여 선생님의 천국행을 배웅하던 날, 선생님은 또 그렇게 말했겠지.


“Thank you for thinking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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