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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시절 내 한 끼를 책임졌던 마라탕(麻辣烫)

by 포공영

마땅히 먹을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그곳에 갔다. 집에서 야시장이 열리는 남쪽으로 한 블록 정도 걷다가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10여 미터를 걷는다. 빨간 바탕에 흰색으로 快乐餐厅(쾌락 식당)이라고 휘갈겨 쓴 간판이 보인다. 세 개의 식당이 함께 영업하고 있어 그런지 문은 늘 활짝 열려 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가운데 식당으로 간다. 마라탕과 죽을 전문으로 파는 데 언제나 북적북적하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재질의 선반에 종류별로 가지런히 쌓여 있는 꼬치는 보통 한 꼬치에 재료가 서너 개씩 꽂혀 있다. 나는 요마이차이(잎이 긴 중국 채소), 메추라기알, 푸주(두부를 만들 때 생기는 막을 건조한 것), 팽이버섯, 연근 등을 골라 집어 든다. 주인아주머니에게 건네면서 당면도 넣어 달라고 한다. 그러고는 동그란 방석 같은 빨간 의자가 4개씩 붙어 있는 공용 식탁의 빈자리에 앉아 기다린다. 학생 식당 같은 그곳에서 겸상은 기본이다. 값은 당시 한 꼬치에 1 유엔에서 1.5 유엔이어서 양껏 먹어도 한국 돈으로 2,000원이 넘지 않았다. 살짝 부족하다 싶을 땐 죽을 같이 시켜 먹으면 매운맛도 중화되어 좋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작은 양푼 같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구운 땅콩 몇 알이 띄워진 갈색 국물, 그 속에 자박하게 담긴 숨 죽은 채소와 메추리알이 나온다. 팔팔 끓는 양념 국물에서 데쳐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음식이라 빠르다. 젓가락 통에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쪼개면서 잠시 식기를 기다린 후 민트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한 요마이차이를 먼저 집어 들고 먹기 시작한다. 연근은 아삭하고, 푸주는 쫄깃하다. 팽이버섯은 미끌미끌하고, 당면은 투명하고 탱글탱글하다. 꼬치를 뺀 구멍 사이로 국물이 스며든 메추리알은 부드럽고 고소하다.


국물은 마시지 않고 건더기만 건져 먹는다. 거칠게 빻아 넣은 고춧가루와 통후추처럼 생긴 ‘화지아오(花椒,붉은 산초 열매)’가 더러 딸려 들어와 뱉어내는 게 성가시지만, 기름기가 전혀 없는 칼칼한 맛이다. 중국에서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마파두부를 먹으며 화지아오(한국에서는 보통 안 넣음)라는 향신료를 처음 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작은 알갱이를 양념처럼 두부와 함께 덥석 씹으니, 입속에서 와그작 부서지면서 순식간에 혀가 화하고 얼얼했다. 먹는 거 맞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고약해서 한동안은 주문할 때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화지아오는 다른 향신료와 함께 여러 중국 음식에 두루 쓰이다 보니 자연스레 먹게 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나중에는 없으면 심심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틈틈이 휴지로 콧물을 훔쳐내며 마라탕을 먹다 보면 목덜미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하게 맺힌다. 중국식 패트스푸드라고 할만한 마라탕, 기름에 볶아내는 것이 주류인 현지 음식이 익숙하지 않았을 때, 개운한 맛에 즐겨 먹었다. 하루에 한 번은 먹을 정도로 중국 생활 초창기 단골 메뉴였다. 막상 중국 현지인 중에서는 몸에 별로 좋지 않으니 자주 먹지 말라하던 이도 있었고 한국인 룸메이트 역시 작작 좀 먹으라며 말렸다. 실제로 배앓이를 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럼에도 끊지를 못했고, 외려 한국에서도 잘 팔릴 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서현이는 자신이 추천하는 마라탕집이 있다면서 길을 안내했다. 내가 사는 곳은 인구 17만 명 정도의 도농복합 도시라 시내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마라탕 열풍이 얼마나 굉장한지 벌써 서너 개의 마라탕 전문 식당을 지나쳤다. 3년 전만 해도 한두 개였었는데, 지금은 열 개도 넘을 것이다. 마라탕 중독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식당에 다다랐다. 내가 한 때 마라탕 중독자였던 기억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국의 마라탕은 중국의 훠궈(火锅, 중국식 샤부샤부) 식당처럼 양념장을 찍어 먹는다. 본디 마라탕은 중국에서 우리네 떡볶이나 꼬치 어묵처럼 가볍게 먹는 저렴한 음식으로 찍어 먹는 양념장이 따로 없다. 훠궈는 전골 음식이라 비싼 편이지만. 흥미롭게도 국물까지 마시는 한국 스타일 마라탕은,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서현이가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맵기를 조절할 수 있고 덜 화하지만, 오래전 중국에서 먹었던 맛과 닮아있었다. 2년간의 한국어 수업을 끝낸 우리는 각각의 입맛에 맞게 주문한 마라탕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서현이가 더듬대는 한국어로 중학교에 다닐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당면 가닥처럼 길게 늘어졌다.


서현이는 중국에서 왔다. 한족(汉族) 출신으로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나이를 한 살 낮춰 초등학교 5학년으로 들어와 6학년까지 한국어를 배웠다.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에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한국어 말하기와 쓰기는 도무지 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학교생활 적응이 쉽지 않아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지만, 내 수업 시간에는 말귀를 알아듣는 선생이 있어 그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밝은 편이었다. 다행히 귀는 뜨여서 한국어를 조금씩 알아들었다.


먼 도시로 떠나 중학생이 된 서현이에게 오랜만에 안부 문자를 보냈다. 혹시 몰라 한국어와 중국어를 같이 써서 보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서너 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별 기대가 없었는데, 카카오톡 문자에 금방 답장이 왔다. 학교는 어떤지, 지낼 만은 한지 물으니, 한국어로 바로바로 답을 했다. 친구도 많고 한국어도 늘어서 잘 지낸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자신의 한국어 이만하면 괜찮지 않으냐고 묻기까지 했다. 마무리 인사로 열심히 하라고 전했더니“쌤도 파이팅이에요!”라고 내게 응원을 보내주었다. 화지아오같이 얼얼했던 한국살이에 마침내 적응한 듯 문자에서 자신감과 발랄함이 묻어났다.


마라탕 가게를 지나치노라면 중국에서의 나와 한국에서의 서현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내겐 추억의 맛이고, 서현이에게는 고향의 맛인 마라탕은 놀랍게도 즉석식품으로까지 나오면서 어느새 동네 편의점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 시절 내 한 끼를 책임졌던 마라탕이 한국에서도 누군가의 출출한 배를 채워주며 이렇게나 사랑을 받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같은 점이 있다면 마라탕을 즐기는 이가 대부분이 젊거나 어린 여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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