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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꿈이 산파라는 아이

사키 또는 소희라는 이름으로

by 포공영

오랜만에 소희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못 보던 사진이 몇 장 올라와 있었다. 소희는 거의 사진을 올리지 않는 데 ‘성인식’이 있던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소희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재일 교포 4세로서 오사카 민단*에서 주최하는 성인식에 참석했다. 소희는 흰 저고리에 노랑 치마를 입고, 뒤로 동글게 말아 묶은 머리에는 꽃으로 장식했다. 진주로 만든 머리띠와 분홍색 옷고름이 포인트였다. 예쁘고 키가 큰 편이어서 성인식에서 눈에 띄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매해 1월 둘째 주 월요일은 ‘성인의 날’로 공휴일이다. 만 20세가 된 청년에게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지자체 등의 단체에서 성인식을 열어 준다. 보통 일본 여성은 ‘후리소데 기모노’*를 입고 재일 교포 여성은 한복을 입고 참석한다. 남성은 주로 양복을 입는 경우가 많으나 일본 남성은 ‘하카마’라고 하는 전통 의상을 입기도 한다.


나는 나중에 ‘소희’라고 불렀지만, 가족과 일본인 지인은 ‘사키짱’이라고 불렀다. 사키(咲希 )라는 일본 이름의 한국어 발음이 소희였다. 나는 소희가 중학생이었을 때 처음 만났다. 내가 다니던 재일 교포 교회에 소희의 할머니도 다니고 있었는데, 소희는 가끔 할머니를 보러 일요일 예배 시간에 맞춰 교회에 들렀다. 재일 교포 2세로 한국어를 전혀 못 하던 할머니는 손녀가 한국어를 배우기를 원했다. 그걸 알고 있던 나는 소희에게 물었다.

“사키짱, 한국어 배워볼래? 내가 가르쳐 줄게.”

소희는 단박에 좋다고 응했다. 그 소식이 기뻤던 할머니가 레슨비를 내겠다고 나섰다. 나는 거절했지만 서로의 마음이 편해지는 천 엔으로 합의했다.


그때 소희는 일본 학교에서 한국 학교(민족 학교)로 막 전학을 한참이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나와 소희는 일요일 오전 교회 식당에서 만나 한 시간가량 한국어 수업을 했다. 보통의 일본인처럼 소희에게도 한국어 받침과 더불어 까, 빠, 따와 같은 이중 자음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리고 총명해서 그런지 매주 만날 때마다 나아졌다. 명랑해 보여서 몰랐는데 소희가 전학한 이유는 학교 폭력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모국어가 일본어이고 이름도 일본식인데 ‘곽’이라는 성을 한국식으로 사용해서였는지 학교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해서 소희가 직접 부모에게 전학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오사카에는 ‘금강’과 ‘건국’이라는 2개의 한국계 학교가 있다. 현재는 국제 학교로 바뀌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사립으로 한국 학교나 민족 학교라 불렸다.


소희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다 쓰는 건국 학교에 다녔다. 나도 학교가 궁금해서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태어난 학생 위주이다 보니 일본어를 더 많이 쓰는 것 같았다. 그즈음부터 일본의 Z세대에게 전과는 전혀 다른 제3, 4차 한류 붐*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예전의 한류는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나빠지면 손님으로 가득했던 한류 가게마저도 금방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급변했었다. 그런데 Z세대에게는 양국 관계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영어 단어를 섞어 쓰듯이 K-POP이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본 인사는 물론 ‘진짜, 맛있어, 괜찮아’ 등과 같은 한국어를 섞어 쓰는 경우마저도 있다고 들었다. 덕분인지 최근 몇 년간 재일 교포의 위상은 물론 한국어나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또한 높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한류가 밀려와도 차별은 말끔히 쓸려 나가지 않는다. 따돌림을 당한 소희가 그 증인이었고, 노년층에서는 여전히 재일 교포라는 것을 쉬쉬하는 때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소희는 새 학교에 잘 적응했고 즐거워 보였다. 한국에서 온 또래 친구와 어울려 놀면서 서로의 언어를 돕더니 실전 한국어도 빠르게 습득했다. K-POP 또한 도움이 되었다. 소희는 BTS를 좋아했다. 소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꼬박꼬박 수업에 나왔다. 교회의 재일 교포 어른들도 소희를 응원했다. 한국어를 배운 지 2년이 지나자, 소희의 한국어는 유창해졌고, 동생 일휘도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 이름으로 잇짱이라고 불리는 일휘 역시 누나를 따라 건국 학교에 입학했다. 일휘는 일요일 오후에 한국어를 배웠다. 소희처럼 배우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꾸준했다. 나는 가끔 한국어 수업에 한국 간식을 만들어 갔다. 또한 남매와 오사카 한인타운에 놀러 가거나 한국식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기도 했다. 소희와 일휘는 말로 음식으로 음악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체험했다. 나는 일휘의 한국어가 유창해지기 전에 귀국했다. 한국에서도 온라인으로 수업을 이어갔지만 몇 달가지 못했다.


소희의 꿈은 ‘조산사’다. 중학생 때부터 한결같이 말했던 꿈이었다. 해서 현재 간호대학을 다니고 있다. 흔들림없이 어릴적 꿈에 정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처음으로 꿈 얘기를 들었을 때는 꿈이 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낯설었다. 의사, 간호사와 달리 조산사는 내게 옛날얘기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조산사(산파)는 출산 전후에 산모와 신생아를 돌보는 의료 전문가로 일본에서는 출산시 병원, 조산원, 가정에 상관없이 조산사가 함께한다고 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작은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산부인과 병원이 줄어들었고 산부인과 의사도 귀해졌다. 조산사도 마찬가지가 아닐지 생각한다. Z세대 소희가 조산사로 만나게 될 새 생명-어떤 세대라고 불리려나-이 살게 될 세상에서는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때도 좋을 때 안 좋을 때가 있겠지만 국적과 상관없이 문화를 소비하는 Z세대를 닮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양국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 역할도 하면 좋겠다.


지난 3월 소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동생 일휘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조상에게 성묘하기 위해 온 것인데 소희가 할아버지의 입이 되어 주고 할머니의 눈이 되어주었다. 소희는 지금까지 내가 가르쳐 본 학생 중에서 가장 정확한 발음과 자연스러운 억양으로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소희가 자랑스럽다.



*민단: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을 위한 단체로 한국의 국시를 지키고 재일 교포의 권익을 옹호하며 한일 교류를 촉진하는 활동을 한다.

*기모노의 한 종류로 긴 소매에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주로 성인식에서 입고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다.

* 1차 1990년대 후반, 2차 2000년대 중반, 3차 2010년대 중후반, 4차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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