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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앙키의 시금치 라자냐

다음엔 꼭 배워야지

by 포공영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앙키와의 연락은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사실 앙키뿐만 아니라 오랜 지인들과도 서서히 연락이 끊어졌다. 내가 먼저 연락을 안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놓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국에서 사는 동안은 아무래도 이래저래 마음이 쓰였다 한다. 그래도 1년에 두세 번 정도는 안부를 묻는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에 그리고 어쩌다 생각이 날 때다.


앙키와의 최근 연락은 2월 초였다. 앙키는 연락할 때마다 잊지 않고 물어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제 영국에 올 거야? 우리 집에 놀러 와.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연락이 없었던 몇 달 사이 앙키 부부는 영국 남부 엑스터에서 중부 맨체스터 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셋째 아들 가족 근처로 옮긴 것이다. 매번 잊지 않고 놀러 오라는 앙키에게는 고맙지만, 놀러 가기엔 영국은 너무 멀다.


앙키와의 만남은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일의 국경 마을에서였다. 중국의 병원에서 조산사로 일하다 귀국한 독일 친구 B의 초대로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몸이 나빠져 쉼이 필요했던 나는 B의 본가에서 한두 달 정도 머물기로 했다. B의 본가는 3층 건물로 B의 어머니는 1층에서 홀로 살고 있었고 나는 2층을 쓰면 된다 했다. 예전에 농장을 했던 곳이라 본가 옆에 큰 창고도 하나 있었는데, B는 창고의 일부분을 개조해 복층 원룸처럼 꾸며 본인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B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은 다른 이에게 임대해 주기도 했단다. B의 고향은 거대한 평야와 숲이 있는 시골이어서 공기도 좋고 조용했다. 물론 이웃집도 아주 멀어서 사람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자마자 B의 친척들이 갑자기 오기로 해서 내가 머물기가 어려워졌다 들었다. 망연자실했던 내게 B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며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앙키였다. B는 독일인이고, 앙키는 네덜란드 사람이었지만 마을의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어 서로 잘 알고 있었다. B의 사정을 들은 앙키는 선뜻 나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싶다 했단다. 하지만 나는 당황스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 그것도 가족이 함께 사는 집에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당시 앙키는 은퇴한 남편과 막 고3이 된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앙키는 밝게 웃으며 자신의 집에 가자고 했지만 그게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금방 떨궈낼 수가 없었다.


앙키의 집은 작은 연못을 둘러싸고 지어진 전원주택 단지에 있었다. 2층 집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듯 새 것이었고, 거실 천정이 2층까지 뻥 뚫린 도시적인 디자인이었다. 1층은 부엌, 화장실 그리고 너른 거실이 있었고, 2층에는 방 3개와 욕실이 하나 있었다. 연못을 향해 있는 2층 테라스의 화분에는 쨍한 색깔의 여름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앙키는 꽃을 좋아했다. 해서 이사를 가도 정원과 화분 가꾸기에 정성을 다했다.


앙키의 가족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친절했다. 그래서였을까 차츰 마음이 편해졌다. 앙키의 가족은 독일어가 유창했다. 앙키는 영어 또한 잘해서 나와는 영어로, 가족과는 네덜란드어로, 밖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들어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앙키의 남편인 다우와 아저씨는 영어를 거의 못해서 앙키나 아들이 통역해 주었다.


내가 머물던 지역이 시골이어서 그랬는지 당시 동양인은 시내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사람과 나 밖에는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집 밖을 나서면 이웃집 꼬맹이들이 고개를 쭉 빼고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앙키 부부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여자, 셋째와 넷째는 남자 그런데 벽에 걸린 사진 속 아이들은 피부색이 달랐다. 첫째는 스리랑카에서 둘째는 아이티에서 입양했고, 넷째는 네덜란드에서 입양했다고 알려주었다. 앙키는 일찍 결혼했지만 임신이 안 되어 입양을 결심했고 그렇게 둘째까지 입양했는데 셋째는 자연 임신이 되어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당시 영국에서 일하고 있던 셋째는 앙키를 많이 닮았다. 금발 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까지도. 막내는 키가 엄청나게 컸다. 내 키가 유난히 작기도 했지만, 2미터 가까운 막내의 앉은 키가 내 선 키보다 커서 한참 동안 모두가 깔깔대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앙키는 요리를 잘했다. 특히 ‘시금치 라자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였다. 화이트소스(베샤멜소스)에 시금치를 넉넉히 넣고 치즈를 듬뿍 얹어 만든 라자냐는 냄새부터 사람을 홀렸다. 그래서인지 앙키를 생각하면 시금치 라자냐가 먹고 싶어진다. 아침과 점심은 빵과 치즈, 과일 등으로 각자 알아서 간단히 먹었다. 저녁은 다 같이 모여 앙키가 만들어준 파스타나 오븐 요리 같은 따뜻한 요리를 먹었다. 체질상 생채소와 생과일을 전혀 못 먹는 앙키였지만 가족과 나를 위해서는 준비해 주었다. 그해 여름 나는 앙키 가족과 두 달을 함께 살았다. 요양 같은 쉼이 목적이라 외부 활동은 별로 없었고, 주로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하루 한 차례 숲으로 산책을 나서는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가끔 앙키 부부와 가까운 지역으로 소풍 가듯 놀러 간 적은 있었지만.


다우와 아저씨는 예순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 앙키는 50대 중반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키는 아들들이 사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부부 사이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만큼 사별의 충격은 꽤 컸다. 당시 앙키는 외로워서 그랬는지 내게 자주 연락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재혼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페이스북에 소박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이 올라왔다. 작은 부케를 들고 있는 앙키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앙키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7년 전 겨울 영국에서였다. 웨일즈에서의 개인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 앙키의 집에 들러 사흘 정도를 머물렀다. 재혼한 남편은 영국인으로 앙키는 그와 함께 잉글랜드 남부 시골 목장에서 살고 있었다. 작은 방갈로는 아늑했다. 도착한 날, 앙키는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단박에 시금치 라자냐라고 대답했다. 앙키는 하하하 웃었다. 거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고 있었고, 갈색 그레이하운드 한 마리가 소파에서 늘어져 쉬는 저녁, 앙키와 배리와 나는 함께 시금치 라자냐를 먹었다. 서로 사별의 아픔이 있는 부부는 오래된 친구처럼 사이가 좋았다. 나는 다우와 아저씨가 그리웠지만 새 아저씨 배리가 구워준 스콘맛에 반해버렸다.


내가 언제 다시 앙키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앙키는 또 물어볼 것이다.

“뭐가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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