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팅이 산다
우리는 맥도널드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생이었던 리팅은 친구와 함께 나왔다. 나나 리팅이나 1대 1로 하고 싶었지만, 리팅의 가족은 낯선 외국인과의 만남을 경계했다. 결국 리팅은 친구와 함께 배우겠다고 말하고 나서 가족의 허락을 받았다. 리팅은 말레이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만다린)가 유창했다. 중국의 푸젠성(福建省) 출신 3세인지라 ‘호키엔 (민난어, 闽南语)’이라는 후지엔 지역의 언어도 가능했다. 이미 네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는데 한국어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셋이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첫 언어교환을 시작했다. 두 번째 만남부터는 친구가 나오지 않아 리팅과 일대일로 한국어와 말레이어를 서로 가르쳐 주었다. 매주까지는 아니었지만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맥도널드에서 만났다. 총명한 리팅은 곧잘 한국어를 배웠지만 나의 말레이어는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기처럼 서툴렀다. 나는 중국에서 살다가 말레이시아로 이사 간 직후라 중국어가 편했다. 말레이어 특유의 추임새가 있긴 했지만 그녀의 중국어는 완벽했다. ‘-라’로 끝나는 그 추임새는 영어에도 있었다.
“오케일라(Okay lah)~, 커일라(可以,keyi lah, 거의 오케이와 동일한 의미)~”
말레이어는 인도네시아, 부르나이, 싱가포르에서도 국어 또는 공용어로 쓰고 있어 사용자만 2억 명이 넘는다. 누군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쉬운 언어 중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라틴 알파벳으로 문자를 쓰고 있어 배우기 쉬워 보일 뿐, 세상에 쉬운 언어는 결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년 가까이 말레이시아에서 살았지만 겨우 인사말과 음식 관련 단어 몇 개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중국어나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이 되어 게을러진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리팅과의 만남은 언어교환이라기보다 한국어 수업에 가까웠다.
리팅의 본가는 쿠알라룸프르 외곽에 있는 유명한 힌두 성지 바투 동굴 근처였다. 산 높이만큼이나 거대한 황금빛 힌두 신은 멀리서도 반짝였다. 그 뒤로 원숭이들이 관광객의 물건을 호시탐탐 노리는 동굴이 있는데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땀이 줄줄 흘렀다. 당시 리팅은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시내에 있는 외할머니, 외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한인이 몰려사는 ‘암팡 Ampang’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멀지 않은 곳에 한인마트와 한국 식당 몇 개가 있었다. 한 번은 리팅을 초대해 집 근처 한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다. 그 시절 냉면은 내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1년 내내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하루 한 끼는 냉면으로 먹을 정도였다. 말레이시아는 면 요리로 ‘미고랭 Mee goreng’이라는 볶음 국수나 중국식, 태국식의 따뜻한 쌀국수 요리를 즐겨 먹는다. 리팅은 찬 국수가 생애 처음이었고, 소고기 육수에 소고기 편육도 처음이었다. 소고기 편육에 놀라길래 이유를 물으니, 집안이 도교를 믿어 소고기는 안 먹어봤다고. 나는 미안했다. 다른 것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리팅은 밝게 웃으며 냉면이 맛있다면서 고기만 빼고 먹었다.
그날 이후 냉면은 뜻밖에도 리팅이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때 한국 음식은 말레이 음식에 비해 2.5배 정도는 비쌌다. 냉면이 또 먹고 싶었던 리팅은 혼자 먹기 아쉬웠는지, 본가의 동생까지 불러 나와 함께 갔던 그 식당으로 다시 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리팅에게 농심의 ‘둥지 냉면’을 소개해 주었다. 나중에는 동생까지도 냉면을 좋아하게 되어 두 자매는 집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리팅이 한국어와 음식을 알아가는 동안 나는 리팅의 가정사를 들었다. 항상 밝은 전구처럼 환하기만 했었는데, 결혼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나는 말레이시아를 떠나며 지인에게 리팅을 소개했다. 리팅은 내가 떠나더라도 이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즈음의 리팅은 한국어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지인도 다른 지역으로 떠났지만 리팅은 계속해서 또 다른 한국인과 한국어를 배웠다. 나와는 보통 문자로 가끔은 통화하며 연락을 이어갔다.
어느 날, 장문의 문자가 왔다. 한글로 ‘언니’라고 시작한 중국어 메시지는 한글 ‘사랑해요’로 끝났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언니, 가족은 외국인을 만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언니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고, 계속해서 여러 한국 사람을 만나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언니 덕분에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리팅은 더 이상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 대학도 졸업했고, 회계사로 일도 시작할 때였다.
직장인 리팅은 돈을 모아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한 항공사 에어 아시아를 타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외국 여행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5년 만에 다시 오사카에서 만났다. 내 집에서 며칠 머물며 오사카를 둘러보고 벚꽃을 구경했다. 나는 매일 아침을 만들어 주었다. 든든히 먹고 힘차게 돌아다니라는 뜻이었다. 리팅은 평생 아침을 안 먹고 살아왔다면서도 주는 대로 잘 먹었다. 마지막 날 저녁은 냉면을 만들어 주었다. 말레이시아로 돌아간 후 리팅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루의 시작이 든든하다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침은 잘 안 먹는다. 그때도 지금도. 여행자 리팅을 위한 아침이었다.
스무 살 즈음에 만났던 리팅은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다. 그 사이 엄마가 돌아가셨고, 그녀는 결혼을 했다. 작지만 자신만의 회계사 사무실도 열었다. 동생도 언니처럼 회계사가 되었다. 여행도 한결같이 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녀와 1년에 한두 번 정도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는다. 이제 그녀의 한국어 수준은 나의 말레이어 수준과 비슷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언제나 잊지 않고 한국어로 하는 말이 있다.
“언니, 사랑해요.”
리팅 만큼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녀의 가정사를 생각하면 그 말이 얼마나 쉽지 않은 지 알기에 더 크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 나도 같은 말로 대답해 준다.
“응, 리팅, 나도 많이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