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영글 때가지
마침내 엄마는 스무 해 가까이 지어왔던 단호박 농사를 그만두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족이 먹고 지인에게도 나누겠다며 50 포기 정도를 심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안 했다. 해서 나도 단호박 넝쿨숲에서 온몸으로 땀을 줄줄 흘릴 일도, 장마 오기 전에 허겁지겁 따내느라 호박잎 잔가시에 얼굴이나 팔뚝이 쓸릴 일도, 하나만으로도 덤벨 3kg만큼 무거운데 네다섯 개씩 망사 부대에 담아 옮길 일도 없었다.
단호박을 따다 보면 커다랗지만, 마저 영글지 못하고 썩어버린 것들을 보이는데 엄마는 그걸 ‘맹과’라고 불렀다. 단호박은 알사탕만 한 호박이 달린 채 피는 암꽃과 그저 꽃만 있는 수꽃이 따로따로 피는데 수정이 안 된 채 자라다 썩거나 떨어지는 열매를 맹과라고 일컫는다. 이상기후로 날이 쌀쌀할 때, 수정해 주는 호박벌이 안 날아다니면서 주로 생긴다.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겉만 봐서는 그게 맹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수확할 즈음에서야 썩는 모습으로 알게 된다. 사실 맹과는 사전에 있는 단어는 아니다. 맹탕, 맹물, 맹추와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것은 아닐지 유추해 본다.
올여름 단호박 맹과는 없었지만, 시골집 바깥마당으로 수백 개의 또 다른 맹과가 쏟아졌다. 커다란 파라솔처럼 그늘을 만드는 개살구나무에 풋매실 같은 열매가 달렸다. 하지만 비 한 번에 후드득 거친 바람에 후드득 힘없이 떨어졌다. 역시나 하얀 꽃이 한창 피었을 무렵 날이 추웠던 까닭에 벌이 날아들지 못해서였다. 바람이 도와주기도 하지만, 수정 전문사인 벌과 비교할 순 없다. 나는 자동차나 일륜차바퀴에 그리고 사람 발에 밟혀 허연 씨앗까지 드러내며 말라가는 어린 살구를 비로 쓸어 모아 퇴비장에 버렸다. 알은 작지만, 맛이 좋아 잘 익기를 기다렸던 나는 아쉬움까지 함께 쓸어 담아 버려야 했다.
수필에 이어 또 다른 글짓기로, 작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를 <글 짓는 농부>라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단편으로 세 편을, 올해는 다섯 편 정도를 썼으니 부지런한 농부는 아닐 게다. 그럼에도 ‘한 마리만 잡혀라.’ 하며 낚싯줄을 던지는 초보 낚시꾼처럼 여러 공모전에 응모했다. 현재까지 세 개의 공모전에서는 탈락, 나머지 두 곳에서도 당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처음에는 ‘혹시’ 하며 복권이라도 당첨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당선 발표일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차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공모전이 있어 그나마라도 썼다고 고맙게 여기고 있다. 수필을 쓰면서도 애어른 모두를 위한 그림 동화 작가를 꿈꾸었다. 그런데 어쩌다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치 농부가 때에 따라 단호박도 심고, 마늘도 심는 것처럼 나 역시 두루두루 글 농사를 짓고 싶은 건가 싶다. 그림 동화를 먼저 시도했어도 좋았겠지만, 그림 없는 동화를 쓰면서 꿈이 생겼다. 그림 동화와 마찬가지로 나는 어른도 함께 읽는 동화를 쓰고 싶다. 북유럽에서 생각하는 ‘어른’은 ‘다 자란 어린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동화 말이다.
한때, 어린이 도서관에서 한두 시간씩 앉아 동화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토끼굴에 들어가면서 신기한 세계를 탐험한다. 나도 앨리스처럼 동화책이라는 굴로 들어가 상상의 세계를 탐험했다. 어른 또는 상식이라는 신발을 벗고 상상의 땅을 맨발로 거닐다 보면 신나게 노는 아이처럼 즐거웠다.
가끔은 아이보다는 어른에게 더 적합한 책도 있었다. 단지 그림책이라는 이유로, 장르가 동화라는 이유로 어린이 도서관에 꽂힌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일반 도서관에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코너를 만들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다 자란 어린이의 마음을 말랑하게 하고, 짧은 몇 줄의 글과 어우러진 그림이 주는 소박하면서도 다채로운 상상의 맛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젠가 그 코너에 내 책도 꽂힌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듯이 책을 양쪽으로 펼치고 맞아줄 것이다. 상상의 굴로 사뿐히 입장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내 글짓기는 결실 없는 맹과뿐이다. 그러나 단호박 맹과가 밭에서 그대로 거름이 되고, 개살구 맹과가 퇴비장에서 거름이 되는 것처럼 내 맹글도 내 글짓기에 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맹과가 그저 맹한 것만은 아니어서 조금 위안이 된다.
자, 그러니 글이 잘 영글어 갈 때까지 글을 짓고 또 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