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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Apr 19. 2022

당신도 박찬욱을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아가씨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아가씨>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어느 네티즌의 관람평, 건조하고 신랄한 단 한 줄의 관람평 때문이다. '더럽게 재미없는 쓰레기 포르노그래피'. 재미야 주관적인 거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쓰레기 포르노그래피'라니... <아가씨>에 붙을 수식어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발언이었다. 익명의 네티즌, 보고 계십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오로지 하나 : 당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부터 낱낱이 짚어보죠, 어째서 <아가씨>를 싸구려 포르노와 비교하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말도 안 되는 모욕인지.


욕망과 억압


    <아가씨>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부, 관능, 권력을 향한. 보편적이고 본능적이지만 정도가 과하면 스스로는 물론이오 주변에까지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 욕망들이다.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 틈바구니에,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시체 같은 '히데코(by 김민희)'가 있다. 그리고 소매치기 '숙희(by 김태리)'는 히데코의 모든 것을 훔쳐내려 그녀 앞에 나타난다. 사실은 자기가 되려 이용당하는 중인지도 모르는 채로.

(출처 : 네이버 영화)

    속고 속여야 마땅하건만 히데코와 숙희는 서로에게 끌린다.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분홍색 실내복을 걸치고,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자기 발을 손질해주는 하녀를 가만 응시하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았는가. 곧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한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을 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을 연기하는 김민희의,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이다. 아가씨도 백작님을 '사랑하게 되실 거'라던 숙희는, 가련하고도 가차 없는 아가씨의 눈물 앞에 결국 요런 저런 거짓말과 욕심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이모부(by  조진웅)'의 커다란 서재를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양의 춘화집과 변태적인 서책을 통해 저택의 어른들이 히데코를 억압해 온 방식을 알게 된 숙희. 생쥐처럼 조그맣고 별 볼일 없는 숙희는 그들의 추잡한 욕망에 인정사정없이 발길질을 하고, 자신의 손에 나는 상처도 개의치 않으며 그 저질스런 수집품들을 찢어발기고 물속에 처넣는다. 그렇게 히데코는 구원받는다. 부서질 것 같은 얼굴로 숙희를 바라보다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손으로 억압의 상징물을 하나, 또 하나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숙희로 인해 히데코는 태어나 처음으로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해방감을 만끽하며 너른 들판을 달리는 두 사람. 혹시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린 코끼리의 다리에 두꺼운 사슬을 매어 놓고, 작고 나약한 새끼로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사육하면, 다 자란 뒤에는 발길질 한 번으로 끊을 수 있는 얇은 사슬에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낮은 담 앞에서 망설이는 히데코의 발 밑에 숙희는 말없이 짐가방을 쌓아준다. 이건 당신의 앞을 가로막는 담이 아니라, 당신을 더 높이 데려가 줄 계단이라고. 재촉하지 않고, 질책하지도 않고 그저 귀하신 '아가씨'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며. 아가씨가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이 구원 시퀀스는 정말이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두 사람의 연대


    히데코와 숙희의 관계가 다른 어떤 단어도 아닌 '연대'라고 표현되어야 할 이유는, 단순한 유대감이나 연애 감정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완벽하게 동등한 관계를 맺는다. 아가씨와 하녀, 나쁜 년과 사기꾼. (이 단어들에 숨어 있는 반어성에 주목해 보시길!) 그러나 빼앗지도 훔치지도 상처를 내지도 않으며, 오히려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더 넓은 세계로 서로를 이끄는 두 사람.

(출처 : 네이버 영화)

    박찬욱 감독은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이미지에 반복적으로 대칭 구도를 활용한다. '백작(by 하정우)'이나 이모부와의 관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수평성. 그리고 얼핏 정반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아가씨'와 '하녀'에게 주어진 의상과 머리 모양을 제거해버리면 사실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는 것. 숙희와 히데코, 인간과 인간의 연대와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하게 아름답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 숙희와 그런 숙희로 인해 인간의 욕망을 되찾은 히데코.

    혹자는 백작과 이모부가 지은 죄에 비해 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니 이모부는 죽어도 싸다 허나 그것은 죄의 경중을 하나하나 따지고 계산해 그에 비례하도록 부과한 벌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만을 쫓아서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타자와 연대할 수 없는, 즉 원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내려진 공평한 심판인 것이다. 따라서 백작과 이모부라는 인물들이 이름도 없이 보통 명사로 지칭되는 까닭은 그들이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인간(人間)의 지위를 상실한 욕망의 먹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미학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모든 인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가장 더럽고 반도덕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이에게조차 그만의 미학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몇 달치 월급을 털어 고급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즐긴 일을 계기로 백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하정우의 마지막 대사(그래도 자X는 지키고 죽어서 다행이다)에 실소하게 되는 것은 (하정우의 익살스러운 연기와)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의 공이다. 지 욕망만 좇다 죽게 생긴 인간이 그 욕망의 상징과도 같은 남근을 빼앗기지 않았음에 안도하다니.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모부는 또 어떤가? 매를 맞아도 쌀 취향이긴 하지만 어쨌든 (음란한) 서책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진심이었다. 그 서책을 관리하고 향유하기 위해 그가 들이는 노고와 비용을 생각하면 더욱더. 귀족 신분을 사기 위해 일본인과 결혼했다는데, 사실 신분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취미'를 더 용이하게 즐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모부의 관심은 오로지 서고에 집중되어 있다. 좀 다른 장르의 책을 수집했더라면... 결국 끝까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고 개죽음당했지만, 그것 또한 만악의 근원이었던 변태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악역들에게도 미학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캐릭터도 대상화하거나 무의미하게 소모하지 않았다는 점에 더해, 서사 구조를 비틀고 재배열하는 기교 역시 너무 훌륭해서 기가 찰 지경이다. 총 3부로 나뉘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빈자리를 메워가는 전개 방식은 그야말로 영화 연출의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미장센이야 말할 것도 없지. 본래도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만나자 동서양의 미가 기막힌 조화의 향연을 이룬다. 오트 쿠튀르 부럽지 않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의상과 고풍스럽고 화려한 저택의 인테리어, 정갈하고 위엄 있는 한옥, 탁 트인 자연 풍경에 생동감 넘치게 재현된 빈민가까지. 스토리텔러로서도, 비주얼리스트로서도, 연출가로서도 박찬욱의 역량은 이 영화 <아가씨>에서 절정에 달했다고 감히 평하고 싶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결과적으로 '아저씨들이 앞장서 퇴색시켜버린 단어의 본래 의미를 복원해내고 싶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의도는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아가씨. 아기처럼 소중히 대해야 할 귀한 여자. 남장하고 가짜 수염을 붙였어도 숙희에게 히데코는 아가씨요, 대도의 사생아에 비천한 소매치기여도 히데코에게 숙희는 아가씨이니.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포르노그래피라고 매도할 수 있겠는가.


단 한 마디 봉준호 이전에, 박찬욱이 <아가씨>로 오스카를 받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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