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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Mar 25. 2022

암살자로 길러져 영웅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다

블랙 위도우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먼저 이 영화에 대한 내 평점을 밝혀보겠다. 별 5개 만점에 4개 반. 그럭저럭 괜찮게 본 영화에 보통 별 3개~3개 반을 주니까, 상당히 높은 점수다. 만화를 기반으로 한 히어로 무비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일반적으로 히어로 무비는 아무리 재미있게 봤어도 4점 이상의 별점을 줄 만한 작품은 (내 기준) 극히 드물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지난 10여 년 간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한 축을 담당했던 영웅 블랙 위도우와 그를 연기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에 대한 예우로서라도 높은 평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액션 맛집, 서사 맛집, 이제는 드라마 맛집까지 노리는 마블 당신은 대체?


    나타샤 로마노프(by 스칼렛 요한슨) 평범한 ( 알았던) 어린 시절로 시작되는  장면은,  레드룸에 의해 암살자로 길러지는 소녀들의 성장과정을 몽타주로 담아낸 오프닝 크레딧과 이어진다. 모든 관객이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는  아주 처음의 시퀀스에서부터 벌써 강렬한 감동을 느꼈다. 감동이라기보다는 농밀하게 응축된 연민 혹은 공감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대략 5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화적 요약은 나타샤의 삶이 현실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것만큼이나 진실하고,  누구보다 치열했다는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담담하게, 발생한 사건들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선별해 담아내는 시선.

(출처 : 네이버 영화)

    역설적으로 그 편집된 틈 사이사이에서 우리는 예리한 기계 부품처럼 작동하도록 훈련받은 소녀들 개개인의 숨은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앞으로의 두 시간 동안, <블랙 위도우>가 명백하게도 인간으로서의 나타샤 로마노프-그리고 그녀의 가족, 동료, 전우들-를 조명하는 영화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세련된 연출이었다.

    눈물겨운 초반부를 지나면, 그야말로 눈 돌아가는 액션의 향연이다. 덩치도 작은 여인네들이 어찌나 날고뛰는지 무릎 관절이 걱정되면서도 입 벌리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래 마블 작들 중에 단연코 가장 뛰어난 수준의 액션을 구사하는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더불어 현란한 액션 공동 1위에 랭크하고 싶다. 다만 <샹치> 쪽이 스피디 하고 타격감 좋은 격투 오락을 연상시키는 맨손 액션과 무협지 스타일의 공중부양 도술 액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블랙 위도우>는 전문 킬러라는 설정답게 총, 칼, 주변 사물 등 온갖 것을 무기로  활용하는 고효율의 액션을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칼날처럼 첨예한 몸짓은 나타샤 특유의 한 다리를 쭉 뻗는 착지 포즈와 이어지며 감탄스러운 멋을 자아낸다.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과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수트가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줄이야.

    히어로 무비들은 위에서 상술한 것과 같은 기깔 나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적으로 스토리가 빈약해지는 경향을 띨 수밖에 없건만, 최근 몇 년 간 마블은 이 치명적인 약점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특히 <블랙 위도우>의 경우에는 플롯이 적당히 잘 짜인 수준을 넘어 가족 영화 내지는 드라마 장르로서의 가치 역시 충분히 입증하지 않았는가.

(출처 : 네이버 영화)

    스칼렛 요한슨, 레이첼 와이즈, 플로렌스 퓨, 세 주역 배우의 합과 시너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레이첼 와이즈를 보면 한국의 문소리 배우가 떠오른다. 두 배우 모두 섬세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연기를 펼치고, 능수능란하게 강약을 조절하며, 연약함과 강인함의 역설적인 조화에서 오는 아우라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플로렌스 퓨의 경우에는 사실 '이렇게 단기간에 정상급 커리어를 쌓아 올릴 만한 특장점을 가졌나?' 싶어서 조금 의아함을 품고 있던 배우인데, 본 작품을 통해 그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순수하면서도 짓궂고, 미워할 수 없는 막내딸 같은 느낌이랄까? 다루는 감정 또한 그 밀도와 순도가 굉장히 높아서 저절로 눈길이 간다.


시켜줘, 나타샤 명예 소방관


    MCU의 팬으로서,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이거다.


블랙 위도우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는데...


    (기억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 <어벤져스 : 엔드 게임>에서 인피니티 스톤 중 하나인 소울 스톤을 찾던 도중, 클린트 바튼-호크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방식의 죽음이 나타샤를 나타샤답게 만든다는 것을.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만, 그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고, 충직하며, 정의로운 인간이니까.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 아니 나타샤와 클린트가 보르미르 행성에 다다른 그 순간부터 모두가 예감했을 것이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나타샤는 결코 자신의 친구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어벤져스의 여정을 함께 한 관객들 대부분 나타샤의 죽음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오랜 기간 곁에 있어서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참 진국이었던 친구를 영영 떠나보내는 기분.

(출처 : 네이버 영화)

    결국 MCU가 수많은 영화팬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원인의 핵심은 이런 요소들이 아닐까. 캐릭터의 인간성, 고뇌와 실책, 만회하려는 노력, 저마다의 의지와 정의. 우리 세대가 이토록 슈퍼 히어로 무비에 열광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만큼 모두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블랙 위도우이자 나타샤 로마노프였던 한 사람의 진실된 삶이,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박제되고, 오랫동안 기억되고, 새로운 의미로 다시 회자되기를 바란다.


단 한 마디 여성 원톱 액션 영화는 노잼이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고개를 들어 <블랙 위도우>를 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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