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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May 01. 2022

국힙원탑 이지은의 페르소나

러브 세트


*가급적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러브 세트>는 졸작이다. 안타깝게도 내 눈에는 그렇다. 오해는 마시길, 난 아이유 짱팬이니까.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다. 인지도와 화제성, 실력까지 갖춘 대스타 아이유를 데리고 어째서 이 정도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지금부터 3가지의 다른 작품과 함께 비교론적 관점에서 <러브 세트>를 분석하고, 영화가 어째서 이지은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백분 발휘하는 일에 실패했는지 들여다 보고자 한다.


CALL ME BY YOUR NAME
(출처 : 네이버 영화)

    티모시 샬라메, 아미 해머 주연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언젠가 본 매거진에서 꼭 다뤄보고 싶은 작품이다!) 이 수작을 감상하다 보면, 감독인 루카 구아다니노 본인 역시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감정선,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깃든 배려와 예리한 정확성.

    반면 <러브 세트>에는 신중함이 없다. 지은과 두나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평면적이고 얕은 것으로 남는다. 남성 캐릭터들과의 관계에 대한 설정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듯 뜬금없는 러브라인.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오는 전개다.


ㅣLOLITA


    <러브 세트>는 말하자면 싸구려 롤리타 콤플렉스다. 나이 많은 남성에게 매달려 있는 소녀의 다리를 훑는 시선. 처녀성의 상실과 첫 경험에 대한 노골적이고 진부한 메타포. 두 여성 캐릭터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아버지와 딸의 부도덕한 관계(에 대한 암시)는 덜어냈어야지. 결과적으로는 서사적 일관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떳떳할 수 없게 되었다.

(출처 : 넷플릭스)

    그렇다면 오리지널 [롤리타]는 무엇이 그렇게 다른고? '[롤리타]라니, 더러운 성적 판타지로 도배된 쓰레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이 책은 '하버드 학생들이 많이 읽는 책' 리스트에서 언제나 10위 권 안쪽의 순위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속 인물들은 실존 인물을 그대로 지면 위에 베껴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체적이다. 롤리타는 (흔히 착각되는 바와는 달리) 늙은 남자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아우라를 지닌 어린 요부가 아니다. 그 애는, 이제 막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 자신에게 동하는 것 같은 잘생긴 엄마 남친에게 장난 삼아 유혹의 시선을 던지지만, 그와 진지한 사이가 된다거나 실제로 육체관계를 맺는다거나 그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시궁창 속으로 몰고 들어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는 평범한 10대 여자애라는 말이다. 롤리타는 어리다. 그 말은, 그 애가 뒷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미래에 닥칠 가능성이 있는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무지, 혹은 무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험버트가 왜 자신에게서 눈을 못 떼는지 롤리타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 아마 이해하고 싶지도 않을걸.

<로리타>, 1997 (출처 : 네이버 영화)

    <러브 세트> 속 아이유의 캐릭터는 이러한 인간적인 특성들을 모두 거세해 버린 평면적 표상에 불과하다. 나아가 이 '롤리타'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에서도 <러브 세트>는 실패작이다. 험버트의 죄책감,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는 배덕적 욕망, 얼핏 그 욕망을 가속하는 듯 보이는 롤리타의 행동과 그 행동에도 불구하고 합리화되어서는 안 되는 험버트의 죄악. 우리는 험버트가 롤리타를 욕망하는 만큼 경멸하고, 경멸하는 만큼 경외하며, 그녀를 파괴하고 싶은 욕구와 보호하고 싶은 욕구를 동등하게 느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험버트가 자신과 롤리타를 상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령 스스로의 가증스러움과 롤리타의 순진한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구절들 말이다) 이러한 객관적 서술을 통해 우리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 판타지가 아닌 인간들의 욕망과 기질,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 본성의 이해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CHAT-SHIRE

 

   뮤지션 아이유의 역사에서 <CHAT-SHIRE> 앨범을 빼놓고는 무엇도 논할 생각을 하지 마시길. 그만큼 이 앨범은 그녀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아마 '스물셋' 활동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러브 세트>적 망상을 한 번쯤 해보았으리라. 순수한 소녀인 동시에 섹슈얼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이유라는 망상. 안타깝게도 <러브 세트>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런 망상에 그칠 뿐이다.

(출처 : 네이버 VIBE)

    반면, '스물셋'은 자칫 위험해질 수 있는 이 롤리타적 판타지를 아이유 본인의 목소리로 훌륭하게 풀어낸다. 이 앨범 전체에서, 아이유에 대한 판타지를 노래하는 화자가 바로 아이유라는 점은 명백한 메리트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아이유의 공이다. <CHAT-SHIRE>를 통해 아이유는 그간 자신이 구축해 온 견고한 세계를 드러내 보인다. (겨우 스물셋의 어린 아티스트가!) 그 세계는 도발적이고, 사색적이며, 연민과 우수가 어려있다. 아이유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각하고, 그것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이야기의 동등한 일원으로 대우하며 이 흥미진진한 서사를 끌어간다. 따라서 <CHAT-SHIRE>에서 섹슈얼리티는 대중의 눈요기를 위한 자극적인 양념이 아닌, '아이유'라는 서사를 전개하기 위한 필수 요소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아이유라는 아티스트의 독보성은 바로 이러한 깊이에 있다. 그리고 <러브 세트>를 한 줄로 평한다면, 깊이 있는 아이유에 관한 깊이 없는 판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출처 : 넷플릭스)

    혹평 일색이긴 했지만, 단편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아이유의 팬이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볼 만한 영화였다. <페르소나> 프로젝트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 오랜 시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의 매력이라는 건 놀랍다. 이야기가 세련되지 않아도, 연기가 대단히 인상적이지 않아도 순전히 그 매력만으로 시선을 잡아끄니. 자신의 주전공에서 정점을 찍은 아이유가 배우 이지은으로서 앞으로 또 무얼 보여줄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단 한 마디 <CHAT-SHIRE> 앨범을 들어주세요. 두 번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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