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헤어질 결심

by 다안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산 vs 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구동성' 게임에 등장하는 몇 가지 단골 주제들을 떠올려보자. 짜장 vs 짬뽕, 엄마 vs 아빠, 여름 vs 겨울 같은 것들. 산과 바다도 그중 하나인데, 아마 상반된 듯 비슷한 듯 아름다운 두 풍경의 우열을 가리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일 테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 이후 무려 6년 만의 신작인 <헤어질 결심>에서, 초록인지 파랑인지 알 수 없는 산과 바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산의 능선처럼도 보이고 파도처럼도 보이는 푸른 벽지와 노트의 표지, 부산 경찰이 수사 중인 살인사건의 용의자 '이지구', 치명적인 청록색 알약과 원피스.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산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 기도수의 중국인 아내 '송서래(by 탕웨이)'가 자신을 취조하는 형사에게 하는 말.


공자왈,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서래는, 산을 좋아하는 남편과 달리 자신은 인자한 사람이 못 되기 때문에 산이 싫다고 말한다. 서래가 중국에서 왔다는 설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표현과 단어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든다. 박찬욱은 영화 내내 언어의 다의성과 미묘한 뉘앙스, 비일상적인 단어를 적극 활용하며 이야기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가령 서래를 담당하는 형사인 '장해준(by 박해일)'의 이름 역시 산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글자(바다 海, 높을 峻)들로 이루어져 있다.

짧게 말하자면, <헤어질 결심>은 초록색으로도 파란색으로도 보이는 사랑의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의 50가지 그림자


영화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산은 두 개다. 서래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이자, 자신의 모든 소유물에 이니셜을 새겨 넣는 편집증적 인물인 기도수가 즐겨 오르던 바위산. 그리고 독립운동군이었던 서래의 할아버지 소유였고 이제는 서래의 것이라는 호미산. 산은 약자에 대한 억압 또는 지배이자 강자에 대한 저항의 상징-즉 상승과 추락이 반복되는 투쟁의 공간-이고, 또한 붙잡아 기억하려는 소유욕이다. 그 싫다던 산을 난생처음 오른 서래는 산에 미친 기도수의 방식 그대로 남편을 처리(혹은 살해)한다. 지금껏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되갚아주며 그를 굴복시킨다. 인자한 자가 산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기도수는 인자하지 않다.

범행 현장이 된 산과 호미산 모두 삭막하다. 남편 / 이민자라는 뿌리와 관련된 서래의 고난을 암시하듯.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렇다면 바다를 좋아하는 자는 지혜로운가. 서래도 해준도,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래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해준은 말한다. 나는 붕괴되었노라고. 그리고 범행의 증거물이 될 수 있는 핸드폰을 바닷속에 던져버리라고.


깊은 곳에 빠트려요.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서래는 해준 몰래 녹음해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감기 해 듣는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곳에 빠트리라'는 해준의 말은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서래의 답은 스스로를 깊은 바닷속에 빠트려 아무도 찾을 수 없게 하는 것. 서래라는 사건을 종결함으로써, 해준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래가 판 구덩이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카메라는 조그만 산처럼 쌓인 모래더미를 클로즈업한다. 파도가 한두 번 치면 모래산은 무너지고, 보다 수백 배는 깊은 구멍이 물에 잠겨 바다가 된다. 산이 아무리 드높다 한들 바다만큼 넓고 깊을까. 서래의 사랑은 그토록 거대하다. 바다는 지혜롭지 않다. 그것은 되려, 망각의 상징이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바보처럼 희생하는 마음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해준은 시체처럼 희뿌연 눈에 인공눈물을 몇 방울씩 떨어트리고, 서래와 해준이 함께 올라 유골을 뿌린 호미산에는 유골처럼 희뿌연 눈이 내렸고, 두 사람이 재회하는 이포에는 언제나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껴 시야를 가린다.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이라는 어구는 이미 너무나 많이 사용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 그러나 박찬욱은 껍데기만 남아버린 말을 회한과 쓸쓸함, 진득한 미련이라는 새로운 알맹이로 채워 넣으며 그만의 재치 있는 변주를 선보인다.


서(西)쪽에서 온(來) 서리 같은 여자


영화는 대체로 해준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구심점을 찾으라면 그건 서래다. 서래는 불법 이민자고, 독립 운동가의 손녀(그러니까 억압받던 식민지인의 후손이면서 본인 역시도 가난한)이고, 남편에게 매를 맞고 산다. 쉽게 말해 서래는 사회적 약자다.

그러나 첫 등장부터 서래는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남편에게 맞아 뼈가 부러진 상태로 병원에 가서도 사람 좋게 웃기만 하고, 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마침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경찰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여주고, 기죽기는 커녕 남편이 '운명'했다며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때문에 경찰들의 의심을 사지만 결과적으로 서래는 수사를 물 먹이고 완전범죄에 성공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해준과의 관계에서도 서래는 언제나 우위를 점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며, 물리적으로도 웬만한 상대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강한 남자가 가난하고 약하고 사회적 입지도 없는 여자에게 끝끝내 휘둘리기만 한다. 해준을 이용할 때뿐만 아니라 해준을 위해 희생할 때도, 서래의 이 역설적인 파워 플레이는 계속된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파란색이라고 말하는 서래의 원피스를 해준은 초록색으로 봤다. 남들에게는 천사처럼 착하고 불쌍한 여자인 서래는, 해준에게만은 자신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태산 같은 존재로 비춰진다.


가장 강렬한 색, 레드


피, 석류, '심장(마음)'. 산과 바다의 푸르름이 지배하는 화면에 간간이 붉은색이 등장하는 이유는,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죽음에 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전작인 <아가씨>에서 그려진 사랑이 연대하고 서로를 보호하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사랑이었다면, 이 사랑은 치명적이고 파괴적이다. <박쥐>나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같은 박찬욱의 강렬한 초기작들에 세련미를 가미해 완성도 있게 세공해낸 느낌이랄까. 재능과 연륜의 완벽한 균형이다. (개인적으로는 <아가씨>로 진즉에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헤어질 결심>은 올해 칸 영화제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해준의 잠복은 감시일까 집착일까 보호일까 배려일까 - 사랑을 이렇게도 그려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레드는 또 팜므파탈의 색이라고 했던가. 박찬욱 감독이 그려내는 여성 캐릭터는 하나같이 매력을 넘어 마력적이다. 그들은 저마다 한계를 갖고 있고, 복잡한 내면과 행위의 동기를 지녔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구태여 남성성을 흉내 내지 않으면서도 강하고, 구태여 연약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단단하다. 이번 영화에서는 탕웨이가 그 역할을 맡아, 신비롭고 아름다운 서래를 완벽하게 구현해냈고. 타국의 언어로도 탁월한 연기를 보여준 탕웨이에게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구도, 색감, 촬영기법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박찬욱 그 자체였던 개성 넘치는 수작과 좋은 배우들의 합은, 이 거장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임에 틀림없다.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명작, <아가씨>가 궁금하다면 : 당신도 박찬욱을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단 한 마디 이토록 새롭고 섬세하고 지적인 언어로 사랑을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박찬욱 말고 또 있을까.


여담 1) 이 주임이 남자인 건 허를 찌르는 반전이었고, 선입견을 박살 내는 박찬욱 식 유머.
여담 2) 해준의 코트에는 주머니가 워낙 많아 아내도 어디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반면 서래는, 단 한 번의 탐사로 그의 주머니 사정을 속속들이 꿰찬다. 기억과 망각, 지배와 헌신. 서래는 해준의 산과 바다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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