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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Sep 17. 2023

나만 아니면 돼

셜리 잭슨,「제비뽑기」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는 미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전부 읽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이 짧은 소설은 여름날, 어느 마을의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제비뽑기 행사를 다루고 있다.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6월 27일에 치러지는 제비뽑기 날, 활기찬 분위기 속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광장 한구석에는 돌무더기가 쌓여있고, 남편들, 아내들,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제비뽑기의 시작을 기다린다. 이윽고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마을의 모든 구성원이 검은 나무 상자에서 쪽지를 하나씩 뽑으면, 웃음은 점차 사라지고 초조함이 광장을 뒤덮는다.

    올해의 당첨자는 테시 허친슨 부인. 너스레를 떨며 마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던 그녀가 제비뽑기의 불공정함을 처절히 부르짖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돌을 골라잡는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를 할 것 없이 (심지어는 테시 그녀의 아이들조차도) 모두가 일제히 테시에게 돌을 던지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출처 : TTBook)


    「제비뽑기」를 관통하는 가장 강렬하고 근원적인 감정은 ‘은폐된 불안’이다. 희생양이 나 혹은 내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초조함은 축제의 들뜬 흥분으로 가장되고 감춰진다. 불안은 왜 은폐되어야만 하고, 어떻게 은폐될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제비뽑기는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오래된 관습이다.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을에 정착한 최초의 개척자들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습임은 분명하다. 또한 다른 고장에서 치러지는 제비뽑기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연례행사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풍습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의는 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이처럼 일상에 완전히 편입한 의식에 개인이 반기를 드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부당함을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그 의식이 인신 공양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띨지라도, 전체의 풍요와 행복을 기원한다는 명분으로 거행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둘째, 제비뽑기는 인간의 본성 깊숙이 내재한 폭력성과 야만성을 자극한다. 1년에 단 한 번, 마을 구성원들은 합법적으로 타인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상술했듯, 이 살인은 다수의 안녕을 위한다는 숭고한 대의를 지니니까.

    추첨의 날이 축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 축제는 공양 제의의 폭력성을 완화하고 은닉하기 위한 가면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아낙네들이 크고 무거운 돌을 고르고, 어린아이들이 웃으며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독자는 언캐니-혹은 불쾌한 기시감-를 느끼게 된다. 행사처럼 즐겁게 묘사된 폭력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가지각색의 사회적 문제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악플, 따돌림, 갑질 등등, 인간은 죄책감이 봉쇄될 수 있는 상황에서 기꺼이 그리고 가벼이 폭력을 행사한다. 확실하게 충족되는 쾌락은 불확실한 후과에 대한 불안보다 강하다.

    무엇보다도 불안의 효과적인 은폐를 가능하게 하는 것, 따라서 의식이 세대를 거듭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설마 내가 뽑히겠어, 나만 아니면 돼’라는 안일한 이기심이다. 희생될 대상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잔인한 제의는 시스템 내에 존속할 수 있고, 살인은 축제가 될 수 있다.

    즐거운 얼굴로 광장에 나온 테시 허친슨은 자신이 올해의 희생양으로 지목되자 그제야 제비뽑기의 공정함과 정당함에 의문을 던진다. 억눌린 불안을 축제라는 껍데기로 예쁘게 포장하는 이 기괴한 제비뽑기는, 결국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효과적인 은유인 것이다.


(출처 : 나무위키)

    셜리 잭슨은 지극히 일상적인 장소를 배경 삼아, 지극히 일상적인 어투로, 지극히 일상적인 공포를 이야기한다. ‘제비뽑기’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된 추악함은 결국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다. 담백하고 서늘한 미국 호러 문학의 진면목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동명의 단편집, 『제비뽑기』를 읽어보시길. 가을을 목전에 둔 축축한 늦여름 밤을 위한 완벽한 선택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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