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교수님과『고도를 기다리며』
2023年 7月.
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P교수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처음 문틈 사이로 엿보았을 때부터 정말 아늑하고 멋진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대화를 나누고, 내 원고들을 대략 훑어보신 끝에 교수님이 내린 결론 : 원석이 있는데 왜 방치했지? 그건 게으른 거다. 극단까지 밀고 나가봐야 한다. 날카롭게 벼려내야 한다.
잠깐 사이에 나를 이토록 꿰뚫어 보시다니, 내 가장 큰 고민까지 말이다.
교수님은 내게 어떤 화가를 좋아하냐 물으셨고, 클림트와 쉴레라고 답했더니, 쉴레를 좋아할 것 같았다고 하셨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쓰는 선이 쉴레의 선과 비슷하다고. 그리고 내 안에도 분명 쉴레와 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게으르냐 이거지
Y의 남자친구-사진을 찍고 싶어 했고, 지금은 유명 포토그래퍼의 어시가 된-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애는 나에게서 억눌린 무언가가 보인다고 했다. 그걸 예술로 풀고 싶어 하는 표현 욕구가 있는 것 같다고도. P교수님도, Y의 남자친구도, 정작 나는 알지 못하는 내 안의 열정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내게서 본 건 무엇이었을까.
교수님은 내 글을 보고 '재미있긴 하지만 아직 문학의 수준은 아니'라고 하셨다. 문학의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말이 말을 불러야' 한다고. 그 말씀을 듣고 내가 떠올린 건 현대영미드라마 강의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고도를 기다리며』. 교수님이 매우 높게 평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고도를 기다리며』가 가진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미라는 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통찰 - 말이라는 게 한없이 불명확하고 텅 비어있듯이. 그 텅 비어있음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내는 대사들. 무한 반복에 묶인, 해방이 일어나지 않는 비결정의 공간.
니체는 선언했다. "신은 죽었다." 위대한 목적과 믿음이 사라진 시대,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권태. 인간의 삶을 의미화하는 장치, 좌표, 연결점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필멸. 그러나 베케트는 이러한 무의미와 권태 속에서 소박한 웃음을 발견해 낸다. 나는 쉴레와 유사한, 베케트의 냉소적 박애주의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