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24)

by 다안

“그보다, 제가 처음으로 들었던 교수님 강의가 뭔지는 기억하세요?”

의자 등받이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돌리는데 선수구나, 아주. 간섭하지 말라 이거지? 알겠다, 알겠어.”

“아니, 영광스럽게도 제 첫 레포트를 기억하신다길래.”

교수님은 피식 웃으며 한결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마 <프랑스 시>였지.”

“아직도 그 과목 가르치세요?”

“너 배울 때랑 커리큘럼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만, 아직 하지.”

“저 그 수업 때문에 전과했잖아요, 불문과로.”

“그랬냐? 그건 몰랐네.”


솔직히 수업 때문은 아니었고, 내가 전과한 건 순전히 최선 교수님 때문이었다. <프랑스 시>는 2학년 때 수강했던 과목이다. 당시에는 국어국문학 전공으로 들을 만한 교양 수업을 찾고 있었다. 기왕이면 새로운 분야를 접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하필이면 불문과 수업을 고른 건 수식어나 군더더기 따위 일절 없는 과목명이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담당 교수의 이름이 재밌어서였다.

최 선. 이름처럼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고, 이름처럼 살지 않는다면 또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성을 떼고 보면 고운 이름이니까 젊은 여자 교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교수님은 여자도 아니었고 젊지도 않았다.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긴 했다. 처음 봤을 때 당연히 30대인 줄 알았으니까.

교수님의 나긋한 음성에 신나게 고개를 꺾어대며 쪽잠에 빠진 학생이 몇이던가. 필요 이상으로 성량을 높이는 법이 없어서일까. 구겨진 낡은 종이를 부드럽게 비빌 때 나는 소리 같은 사람이었다. 말하는 사이사이에 다음 말을 생각하느라 시선은 주로 천장에 가 있었고. 다수 앞에서 말하는 일에 능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키는 훤칠했는데 원체 살이 안 붙는 타입이라 학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학다리’였다. 교수님은 목을 앞으로 빼고 양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건들한 모양새로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옷맵시는 언제나 단정함과 한 끗 차이로 세련되어서, 우리는 모두 그가 강단에 선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학생들한테도 꼬박꼬박 존칭을 썼고, 여자나 동성애자를 깎아내리는 발언도 일절 하지 않았으니까.


랭보와 베를렌의 그 유명한 스캔들에 대해 강의할 때도 가치 판단은 쏙 빼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고만 말하는 식이었다. 그 뒤에 질문하듯 덧붙인 혼잣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베를렌은 랭보를 유일한 사람으로, 소중한 연인으로 경애한 걸까, 위대한 시인의 영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정복자이기를 욕망했던 걸까.”

어쨌든, 교수님은 밝은 어조로 화제를 전환했다. 중간고사 대체 과제의 주제는 랭보와 베를렌을 같은 상징주의 시인으로 분류하는 이유, 그리고 두 시인이 반복적으로 다룬 모티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기술하는 겁니다. A4 3장 이상. 금방 쓰겠지? 야유와 투정이 쏟아져도 교수님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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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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