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건 사람은 벤이었다.
나는 제법 놀랐다. 벤은 전화기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남에게 먼저 하는 연락이라고는 일절 없는 그가 휴대전화를 꼬박꼬박 챙겨 다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소식 없이 살 거라면 최소한 전화는 제때 받아야 살아있는지 확인이라도 할 것 아니냐’고 하도 성화를 부려서이다. 물론 그 주변인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고.
“어쩐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나는 기특함을 가득 담아 인사조차 생략하고 물었다. 벤은 내 말을 끊고 급박하게 질문을 쏟아냈다.
‘아직 학교야? 오늘이지? 그 교수 보러 간다고 한 날. 지금 어디야?’
“방금 끝내고 나왔어. 왜?”
벤은 한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다. 수업 때문에 당장 필요한 자료들이 있는데, 우리 학교 도서관은 내부 공사 중이더라고. 혹시 네가 좀 빌려다 줄 수 있을까?’
“그래. 리스트 적어서 보내줘.”
‘Thank you. I owe you! 이 빚은 꼭 갚을게.’
“됐어, 뭘 이런 걸 가지고.”
난 전화를 끊고 그새 차게 식은 두 손을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겨울이 다 왔는데, 예년보다 높은 기온 때문인지 캠퍼스의 나무 중 꽤 많은 수가 아직 단풍잎을 달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질리도록 오간 산책로가 새삼 낯설어 보였다. 한때 이곳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걷는 것이 도리어 이곳과 무관한 사람인 것보다 더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기분이었다. 애써 관심을 돌리려고 해봐도, 파리에서 보낸 추운 계절이 저절로 의식의 수면으로 부상했다.
Bienvenue à Paris! 파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잃어버리지 말라는 듯 어느 길 위에서도 에펠탑이 보인다. 협잡꾼과 소매치기가 수천 쌍의 눈을 빛내는 몽마르뜨 언덕의 대성당 앞에 서면,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가 지고 하늘은 짙은 푸른빛으로 물든다. 밤바다처럼 어두운 도시의 표면을 하나둘 떠오른 노란 물고기 같은 불빛이 밝히기 시작한다.
내가 프랑스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반드시 파리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도시의 억양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더 따뜻하거나 물가가 싼 도시는 많았지만, 내 말투가 불어를 가장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들과 비슷해지기를 바랐다. 실제로 파리지앵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억양을 갖고 태어나는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른다. 이 추측의 신뢰성과는 관계없이 그해 가을과 겨울, 그다음 해의 봄과 여름을 프랑스의 수도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겨울이 제대로 마무리되기도 전에 나는 도망치듯 파리를 떠났다.
몽마르뜨 언덕 위에서, 센느 강변에서, 머물던 하숙집의 창가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글쎄, 그걸 야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너 시면 대지 아래로 해가 숨어들던 파리의 겨울은 부푼 밤으로 가득했다. 이른 밤하늘을 향해, 따뜻하게 빛을 발하는 수십 개의 창문과 그렇지 않은 창문들이 모여 하나의 건물로 솟아오른다. 노랗게 발광하는 안개에 휩싸인 수백 개의 건물이 또 한데 모여 창밖의 야경을 이룬다. 창틀에 이마를 기대고 밤의 파리를 가만히 지켜보는 동안 내가 느낀 감각은 쩔쩔매게 만드는, 안절부절못한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게 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고통이었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강한 감정은 폭력적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과 그 풍경 속에, 불을 밝힌 천 개의 창문 안에 그 몇 배는 족히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은 때때로 요동치는 좌절을 빚는다. 어쩌면 내가 결코 포함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낯선 이국의 땅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서 단 한 번도 이방인이 아닌 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잘못된 시대에 어긋난 장소에서 태어나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를 잉태한 사람은 단지 미완의 육체를 낳아줬을 뿐, 우리는 탯줄 이외의 것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누구와도 마찬가지였다.
질투나 재채기를 의지로 통제할 수 없듯이, 나라는 인간, 그 틀 안에 흐리멍덩한 개념에 불과한 자아를 맞춰 넣는 행위는 긴장을 늦추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연약한 것이었다. 맥없이 흘러내리고 넘쳐흐른 부분들이 고여 지저분한 잔해가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무언가가 남아 있기는 했다면,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볼품없고, 꼴 보기 싫었다. 나는 정말로 추해지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