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27)

by 다안

불행은 매번 색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괴롭힌다. 날 선 불면의 밤들로, 불쾌한 자기 혐오와 조절되지 않는 중독적인 분노로, 때때로 선천적이며 물리적인 결함이라 여겨질 만큼 지독한 외로움으로.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새벽에 베개 위에 머리를 누이고 잠드는 대신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면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긴 대체 누구의 방이란 말인가? 우주 혹은 심해를 유영하는 단 하나의 인간. 아니, 나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실체가 맞는가?

작고 초라하여 하찮은 존재는 언제 무한에 삼켜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늘 옆자리에 재운다. 까마귀가 우는 영원한 밤이다. 우리는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밤 속에 산다. 그리고 어느 날, ‘두 번 다시는 아침이 오지 않으리라’는 참인 명제를 찾아낸다, 완전히 투명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인간의 힘으로 진리를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다. 다만 반투명한 장막을 그 위에 덮고 언뜻언뜻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을 못 본 척 살아갈 뿐이다. 실수로 너무 많이 걷어내 버린 베일을 다시 드리울 수 없다면, 그래서 더는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다면, 그 깨우침이 곧 죽음이 아닐까.


스물둘에서 셋이 되던 겨울에, 나는 삶으로부터 완전히 나가떨어져 있었다. 더는 생활(生活)이라 부를 수 없는, 그저 연명하고 있을 뿐인 공허한 시간. 센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때면 난간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다리의 정중앙으로만 걸었다. 가로등이 점점이 켜진 난간은 강으로 추락하는 사람들을 막아주기 충분할 만큼 높고 견고해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언저리에서 내가 느낀 것 하나는, 나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시절이 없다는 것이다. 비단 파리에서의 날들만이 아니라 나의 역사는 항상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고 과거를 망각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나온 시절의 나를 마주하는 건 난처하거나, 혹은 부끄러울 뿐이다.

반면에 벤은 한 사람의 삶에 단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불행을 수도 없이 거쳐 왔으면서도 그 기억들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끌어안았다. 그는 많은 걸 숨겼지만, 그건 불필요하게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은닉이지 그 자신의 시야에서도 치워 버리려는 도피는 아니었다.

그런 벤의 태도는 그가 정말 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나무는 한 번 뿌리를 내리면 베이거나 불타버리거나 쓰러지거나 썩어 문드러지기 전까지는 어떠한 풍경으로부터도, 날씨로부터도, 흡연자의 침이나 개 오줌으로부터도 도망칠 수 없으니까.


파리에서도 질리도록 느꼈지만,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추적추적 시렸다. 벤이 부탁한 두꺼운 전문 서적들을 빌려 두 팔에 한 아름 안고 도서관을 나서니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비 온다는 예보 없었는데. 하여간 이놈의 일기예보는 맞는 법이 없지.

가방을 가져오지 않은 터라 머리만 가리고 뛰어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책들이 잔뜩 젖어버릴 테니까. 나는 난감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다.

“역까지 가시는 거면 같이 쓰고 가실래요?”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젊은 남자가 우산을 펼쳐 들고 서 있었다. 가방도 책도 없고, 기온에 비해 지나치게 단출한 차림이었기 때문에 이 학교의 학생인지, 관계자인지, 상관없는 외부인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말투나 얼굴에 노숙하다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대충 내 또래일 거라 짐작했다.

“아, 그래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난데없는 친절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달리 대안이 없는 데다가 딱히 훔쳐 갈 만한 귀중품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감사히 내게 주어진 작은 행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자는 나와 나란히 서서 머리 위로 우산을 들어 올렸다. 굵은 빗방울이 우산에 닿아 아주 작은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를 냈다. 특별히 눈여겨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손잡이를 쥔 까무잡잡한 손에 시선이 저절로 갔다. 자질구레한 상처들과 그걸 전부 가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보이는 밴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족 없이 걷고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힐끔 넘겨다봤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얼굴이었고, 그 때문에 더더욱 구체적인 나이나 직업 따위를 예측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단서라면 아마 주머니에 잠겨 있는 왼손에도 잔뜩 나 있을 잔 상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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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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