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가 목수거나 조각가일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공방에 앉아 장갑을 끼고 커다란 톱으로 나무 합판을 써는 모습이나, 널따란 아틀리에에서 정과 망치를 들고 대리석을 깎아 내는 모습 모두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어쩌면 화학자일지도 모르지. 명탐정이자 뛰어난 범죄학자,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인 셜록 홈즈는 화학에 관해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손은 위험한 약품을 다루는 잦은 실험 때문에 항상 상처투성이에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 얼룩은 없었고, 유독한 물질에 벗겨진 거라기보다는 날카로운 단면에 베이거나 찔린 듯한 상처가 주를 이뤘기 때문에 금방 이 가설은 그다지 현실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남자는 내 눈길이 불편했던지, 입고 있던 회색 카디건 소매로 슬쩍 오른손을 가렸다. 나는 짓궂게 남의 비밀을 들춰낸 기분이 되어 비가 맹렬하게 부딪어 오고 있는 바닥으로 관심을 돌렸다.
어쩐지 언짢더라니, 얇은 캔버스화는 물로 얼룩져 있었다. 양말도 축축했다. 치고 올라오는 짜증을 한층 돋우는 건 조금 전부터 지끈지끈 쑤시는 머리였다. 어차피 젖은 거, 바닥에 고인 물방울을 난폭하게 튀기면서 걷다가, 두통의 원인이 옆에 있는 남자에게서 나는 짙은 향 때문이라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
비릿한 비 냄새에 신경이 쏠려 알아채지 못했는데, 남자에게서는 지독한 꽃향기가 났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 빨간 꽃잎을 가차 없이 짓이겨 코 앞에 들이대는 듯 생생한 장미 향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그 향의 또 다른 소유자를 기억해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장미 향을 풍기는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비 냄새 좋죠.”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독백이었다. 나는 산통을 깨는 것일까 봐 대꾸하기를 망설였으나, 허물없는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좋네요. 비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비 오는 날에는 별일 없어도 그냥 나와서 걷는 걸 좋아해요. 이 학교 산책로 잘 돼 있잖아요.”
그가 왜 이토록 가벼운 차림으로 캠퍼스를 배회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학생이 아니라 동네 주민이었군.
“근처에 사세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우리가 이미 지나온 골목길을 가리켰다.
“저기로 들어가서 좀 걸으면 돼요.”
“앗, 역까지 가시는 건 줄 알았는데. 괜히 저 때문에 귀찮게 왔다 갔다 해서 어떡하죠?”
“아뇨,”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남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문제의 답을 써 내려가듯 진지하고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비에 젖은 옷 냄새는 좋지 않잖아요.”
나는 가볍게 이의를 제기했다.
“비 냄새는 좋다면서요.”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네, 그러니까 우산을 써야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놓고선 금방 후회했다. 분명 얼빠져 보였을 거야. 상냥하시네요. 그런 이유로 모르는 사람한테 우산을 다 씌워주시고. 그렇게 말할까 하다가 결국 역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쩐지 좋은 말이라도 이 사람을 평가하거나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쓸데없는 얘기를 덧붙이는 대신에, 그냥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했다. 유별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남자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터벅터벅 멀어져갔다. 아마 만족스러울 정도로 비 냄새를 흡수하기 전까진 귀가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그의 한가로운 걸음을 지켜보다가 그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잘 보이지 않게 될 때쯤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