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도시의 말 (29)

by 다안

두 명이 한 개의 우산을 나눠 썼던지라 어쩔 수 없이 오른쪽 소매가 젖어있었다. 지하철이 선로 위를 내달리는 동안 어떻게든 옷과 신발을 말리려고 자세를 바꿔가며 꼼지락댔지만, 실내 공기도 바깥과 다를 바 없이 눅눅했기 때문에 전혀 소용이 없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내리자마자 곧장 벤에게 전화를 걸었다.

“Allô, 나 지금 도착했는데, 우산을 안 갖고 왔어. 데리러 나와줄래?”


비 때문인지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고 있자니, 벤이 짙은 초록색 우산을 쓰고, 손에는 접는 우산 하나를 더 들고 날듯이 걸어왔다. 서둘러 오다가 웅덩이라도 밟았는지 왼쪽 바짓단에 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누가 도망가기라도 한다고. 벤은 가지고 온 튼튼한 종이봉투에 책들을 받아 넣고 내게 검은 우산을 건넸다.

“올 때는 어떻게 왔어? 나오면서 전화를 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모르는 사람이 우산 씌워줬어.”

응? 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도 문제를 내보기로 했다.

“젊은 남잔데, 학생인지 직장인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운 차림이야. 눈매가 살짝 처졌고 뭐랄까, 건강해 보여. 주기적으로 볕을 쬔 피부에 군살도 별로 없고. 그걸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흐릿한 인상. 근데 손에 뭔가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엄청 많아. 밴드를 여러 개 붙였는데도 다 안 가려질 정도로. 그리고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강한 장미 향이 나. 뭐 하는 사람일 것 같아?”

“너한테 우산 씌워준 사람 얘기야? 흐음.”

열성적인 침묵이 빗소리를 뚫고도 희석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보 같은 질문에도 입술을 톡톡 치며 진지하게 대답을 고민하는 벤을 보니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코끝이 간지러웠다.

“넌 뭐라고 생각했는데?”

벤이 내게 물었다.

“화학자.”

“Like Sherlock Holmes?”

“C’est du bon. 아니면 목수거나, 아니면 조각가거나.”

나는 답변을 독촉했다.

“그래서 정답은?”

“직업은 모르겠지만, 분명 장미꽃을 한 아름 맨손으로 꺾다가 상처투성이 손을 갖게 된 걸 거야.”

“오호.”

“그래서 상처 사이사이에 장미 향이 배어버린 거지.”

“뭐랄까, 슬픈 동화 같네.”

가시에 그만큼이나 많이 찔려야 그런 진한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희연 언니한테도 장미 향이 났었지.”

나는 남자가 풍기던 향의 본래 주인을 드디어 찾아내고는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벤은 미간을 빠르게 찌푸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차 싶었으나 그 이름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쉽게 희연 씨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남자와 희연 씨의 인상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뭣보다 두 사람 다 그 향에서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연 씨에게도 낯선 남자에게도 장미 향은 너무 붉었다.


왜인지는 의문인데 일단 희연 씨는 나를 좋아했다. 벤의 친구여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 말론 레드 로즈. 뿌려볼래?”

이 향은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녀가 했던 대답이다. 나는 향수에 관해서는 문외한인데도 불구하고 조 말론이라는 브랜드와는 구면이었다. 선명하게 남아있는 어릴 적 기억 중 하나로,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유리병에 거창하고 반듯하게 쓰여있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꼭 그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그걸 뿌리고 나면 웬일로 기분이 잔뜩 좋아져서, 집을 나서기 전에 선심 쓰듯 자장가를 불러주고는 새벽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장미 향은 아니었지만, 그런 날의 엄마한테서는 화장대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싸구려 향수들과는 완전히 다른, 적나라하지 않으면서도 풍성한 꽃향기가 났다.

나는 향수를 싫어하기 때문에 희연 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희연 씨는 조금 아쉬워했다. 남동생밖에 없는 그녀는 항상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자매를 갖고 싶어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보였는지도 모른다.

“시시해.”

벤이 갑자기 말했다. 아마 희연 씨와 그녀의 장미 향수를 언급한 것에 대한 대답이리라. 이상한 평가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불편해하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책을 배달해준 대가로 벤은 내게 저녁을 대접했다. 옷과 신발을 말릴 드라이기도 빌려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벤의 부엌에 앉아 나는 그에게서도 향기가 난다는 생각을 했다. 코에 의해 실제로 감각되는 것인지,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저런 어울리지 않는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 이루어진 향이었다. 오래된 데다가 아무도 찾지 않아 켜켜이 먼지 쌓인 서고의 푸석한 노스탤지어, 옷깃 사이로 독하게 배어든 담배 연기, 갈라진 나무껍질과 알싸한 통각, 그리고 아기의 볼에 묽게 물든 희뿌연 우유 냄새.

그처럼 서로 다른 향들이 전부 한 사람에게서 느껴진다는 건 언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장미 가시에 찔려서 장미 향이 나는 거라면 많은 것들에 쓸려 온 벤에게서 많은 냄새가 난다는 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으며, 나는 우산을 씌워 준 남자의 말이 정말 옳다고 생각했다. 새뜻한 비 냄새와 달리, 비에 젖은 옷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상쾌한 냄새가 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벤의 향기로움에 잔뜩 젖은 내가 전혀 향기롭지 않듯이.


다 자란 나이에 느닷없이 고아가 된 그의 옆에서 어깨를 쓸어 주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기 직전,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만난 친구였다. 남자는 한 아름 품에 안은 꽃다발처럼 풍요롭고 화려한 향내를 풍기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많은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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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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