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말들과 비슷했던 농도의 말. 그러나 곡예사는 남자의 말이 근사하다 생각했다.
두 사람은 쉽게 친구가 되었는데, 곡예사에게 그건 색다른 일이었다. 그는 한 번도 쉬운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도시의 밤은 선명했다. 채도 높은 어둠이 내릴 때마다, 곡예사와 그의 친구는 가로등이 점점이 켜진 다리 위를 걸으며 두 손을 깊숙이 주머니에 담갔다.
- 노래를 불러주세요. 나를 얼러주세요.
도시의 건물은 어지러운 황금빛이었다. 장미 향을 풍기는 남자는 순순히 강바닥에서 노래를 낚아 올렸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곡예사는 그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였기 때문이다.
- 담배는 도시의 길 위를 유람하며 피워야 해.
남자는 조향사였다. 곡예사는 그가 목수거나 조각가일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손에 상처가 많은가요? 그는 조향사에게 물었다. 내가 지독한 결벽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죠. 조향사는 대답했다. 그리고 향수를 만들 때 쓰는 화학물질들은 생각보다 독하거든요.
도시의 불빛을 머금은 하얀 새 떼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밀려왔다. 무른 발바닥은 노란 다리의 난간 아래 녹아 별 없는 밤하늘과 강을 따라 흘렀다. 상처의 사이사이에 소금 대신 향료가 배어들어 이토록 아찔한 향이 나는가, 그는 생각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조향사는 묵묵히 어머니를 잃은 친구의 곁을 지켰다. 묘 위에는 장미를 잔뜩 심었다. 늙고 지친 어머니도 그 풍성한 향에 포근히 안겨 잠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곡예사의 어머니는 부유했고, 아름답고 커다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충실한 친구에게 내어줄 만한 품위 있는 방도 많았다.
무심히 흐르는 나날은 평화로웠다. 곡예사는 아침저녁으로 숲길을 걸었다. 그가 뛰어내렸던 작은 절벽을 찾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곳으로 가는 길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오후에는 어머니의 정원을 가꾸거나 어린 시절 그를 오색찬란한 환상들로 현혹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지도 않고 대담하게 삼켜버리고,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공상에 잠기기도 했다. 간혹 자유롭게 떠돌던 때가 그리웠지만, 그는 이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조향사는 젊고 아름다웠다. 두서너 개쯤 흰머리가 올라온 곡예사와는 다르게, 그의 머리카락은 풍성한 붉은 갈색이었다. 그는 종종 집 주변과 마을 언저리를 따라 달렸는데, 그럴 때 그의 두 뺨과 목덜미에 흐르는 땀방울이 솔향처럼 싱그럽다고 곡예사는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커다란 집을 맴도는 대기가 소름 끼치게 공허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당혹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집안의 모든 은 식기와 현금, 심지어는 값나가는 가구까지 홀라당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시하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나서, 곡예사는 짧게 평했다. 텅 빈 집은 아름답지 않았다. 쓸쓸하고 비참한 노인의 살가죽처럼 보였다. 그가 분노한 단 한 가지 이유는, 수십 년간 어머니의 손과 떨어진 적이 없던, 그리고 어젯밤까지는 가는 손가락 대신 그의 목에 매달아 두었던 반지가 그를 떠났기 때문이다. 순금으로 테를 두른 반지에는 알이 굵은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해 질 녘 즈음에 친구가 포도주를 권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결코 깊게 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수화기는 침묵했고, 그는 새벽의 고요에 갇혀 가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찻잔 바닥으로 찌꺼기가 가라앉았다.
곡예사는 어머니의 묘로 달려가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꽃들을 맨손으로 거칠게 뽑아냈다. 날카로운 가시에 긁혀 손바닥과 손등, 가느다란 열 손가락에서 피가 샘솟아 흘렀다. 그는 조향사의 손을 떠올렸다. 그의 손은 볼품없었다. 향기롭지도 않았다.
상처투성이 손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곡예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피가 나는 곳은 손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곳이 아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걸었던 길을 불 앞의 나방처럼 정신없이 맴돌다 그는 어린 시절 날아올랐던 작은 절벽을 갑자기 맞닥뜨렸다. 기억이 생생하게 솟구쳐 후두부를 때렸다. 왜 여태껏 그곳을 찾아낼 수 없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그건 절벽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높이의, 그저 커다란 바위 몇 개가 우연히 겹쳐 비스듬한 섬처럼 솟아있는 자그마한 공터였기 때문이다. 아팠던 곳은 30년 전에 무언가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더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고향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곡예사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숨을 빼앗겨 땅속에 묻힌 어머니의 곁을 떠났다. Au revoir, maman. Au revoir!
아무것도 없는 그를 받아줄 곳은 결국 싸구려 서커스단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 그는 거리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것, 나무처럼 곧게 뻗은 몸만을 이용해 묘기를 부렸다. 그러다 보면 동전 한두 개가 깡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얗고 보드랍던 손에는 크고 작은 굳은살이 배겼다. 장미 가시에 베이고 쓸린 상처는 흉터로 남아 밤과 꿈을 괴롭혔다.
발 대신 흉터투성이 손으로 걸어서라도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이국의 사막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아직 싱그러운 젊음을 가졌던 때에 단 한 번 건너본,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하얀 사막이었다.
그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고향의 숲을 걷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누구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열대의 바다처럼 파란 눈을 가진 남자는 그에게 침을 뱉었다. 낯익은 얼굴의 꼬마는 험악한 욕설을 지껄이며 그를 지나쳐 갔다. 그런 말을 듣는 건 익숙했지만, 말하는 입은 작고 여렸다.
가지고 있는 것도 많지 않았으나 그마저 전부 빼앗기곤 했다. 곡예사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로, 그는 겨우 그 정도로 시들지 않았다. 단 하나 그가 결코 무뎌질 수 없었던 고통은 안에서부터 갉아 먹히는 빈자리의 존재감이었다. 절벽을 다시 찾은 순간부터 되살아난 공허감은 역설적으로, 텅 비어 있어서 더 쉽게 눈에 띄었다. 이미 다 헐어버린 피부의 내벽은 다시, 또다시 곪고 터졌다.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내 하얀 사막의 가장자리에 도달했을 때, 곡예사는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었다. 그대로 모래 위에 쓰러진 그의 귀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태양이 빛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옷감을 두른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얇은 커튼처럼 불어와 그의 앞에 잠시 머무르고는, 어느 날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 훌쩍 사라졌던 옛 연인이었다. 우유처럼 휘감기는 목련꽃이 우수수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