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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매거진 제2호] 축구의 전성기를 논하다

# 한휘준 Chief Editer '서문'


전성기. 형세나 세력 따위가 한창 왕성한 시기를 말한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전성기가 찾아온다. 개인이 펼치는 전성기일 수도 있고, 특정 조직이 이룩한 전성기에 포함되는 형태일 수도 있다.


축구라는 스포츠에서도 전성기가 갖는 의미는 꽤 거대하다.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선수나 팀의 전성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과거에 누렸던 전성기를 추억하지 않는가.


그래서 풋볼매거진 제2호는 축구의 전성기를 독자들과 논하고자 한다. 선수, 구단, 리그 등 축구에서 발생하는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해 두었다.


자,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 축구의 전성기를 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축구의 전성기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Part 1 - Team

# 이경민 Editer 'Golden generation, heyday of Monaco'


축구에서 ‘전성기’ 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을 가져다준다. 선수에겐 최고의 퍼포먼스를, 클럽에겐 트로피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단어다. 비록 짧은 전성기였지만 그 기간만큼은 유럽에서 가장 빛났던 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강렬한 임팩트로 짧지만 화려했던 ‘전성기’ 를 보냈던 그들을 추억하며 16-17 시즌 AS 모나코를 여러분께 소개한다.


2011년 강등 후 모나코는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여 유럽 정상을 노리겠단 포부를 밝혔다. 팔카오, 무티뉴 등을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꾀했지만, PSG의 아성을 넘을 순 없었고 스타 선수보다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이에 모나코의 기세는 다소 주춤해졌고 이들에 대한 주목도도 하락했다.


하지만 모나코는 조용히 발전을 거듭했다. 13-14 시즌 승격 직후 2위, 3위, 3위라는 순위를 기록 하며 안정적으로 리그에 안착했다. 2014년 여름,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기로 한 팀 정책에 따라 스포르팅의 주축으로 좋은 성적을 냈던 자르딤을 감독으로 선임했으며 가능성 있는 유망주들을 영입해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맞이한 16-17 시즌,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을 그들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리그에서 유망한 모습을 보이던 시디베와 멘디가 16-17 시즌을 앞두고 합류했으며, 베르나르두 실바와 음바페, 르마, 파비뉴, 바카요코 등 기존에 있던 유망한 자원들이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모나코는 16/17시즌 리그 앙 38경기 30승, 107 득점, 31 실점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내며 리그앙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리그뿐만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또한 맨시티와 도르트문트를 각각 16강, 8강에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이는 16-17 시즌 프랑스 클럽 중 가장 높은 순위이며 AS 모나코가 유럽의 강팀들을 상대로도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었다.


하지만 16-17시즌 이후 클럽의 규모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팀의 주축이었던 젊은 선수들을 대부분 이적시키며 엑소더스의 결말을 맞이했다. 결국 모나코 ‘황금 세대’의 시간은 1시즌에 불과했던 것이다.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전성기’라 칭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그만큼 그들이 보여준 1년은 막강했다. AS 모나코는 20-21 시즌 현재 3위에 위치하며, 다시 한번 유럽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지난 엑소더스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날아 오를 수 있을까. 지금도 AS모나코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 류정제 Editer '퍼거슨 유나이티드'


맨유는 퍼거슨 감독 은퇴 이후 모예스, 반 할, 무리뉴, 솔샤르로 이어진 8시즌 간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솔샤르 감독 체제에서는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과거 맨유가 이룩했던 전성기는 어땠을까?


맨유의 전성기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알렉스 퍼거슨이다. 1986년 맨유 감독으로 부임해 2013년 은퇴할 때까지 28년간 PL 우승 13회, FA컵 우승 5회, 리그컵 우승 4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커뮤니티 실드 우승 10회, 피파 클럽 월드컵 우승 1회, 인터컨티넨셔널컵 우승 1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총 38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01/02, 04/05 시즌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야말로 맨유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거슨은 크루이프, 사키, 무리뉴, 과르디올라, 클롭 같은 혁명가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명장에게 없었던 특별한 능력 2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선수의 장점을 최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는 능력이다. 모든 선수에게는 장단점이 있다. 선수를 어떻게 기용하느냐에 따라 장단점이 도드라지는 정도가 다르다. 그러나 퍼거슨은 장점을 이끌어내고 단점을 감추는 능력이 탁월했다. 실제로 은퇴 시즌이었던 12/13시즌 스쿼드는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앞서 말한 능력을 바탕으로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는 선수단 장악 능력이다. 아무리 대단한 스타플레이어라도 선수단에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감독의 권위를 넘보는 선수가 있다면 철저하게 관리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데이비드 베컴, 반 니스텔루이, 야프 스탐, 로이 킨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퍼거슨의 귄위에 도전했고 결국 이적을 면치 못했다. 상술한 2가지 능력뿐만 아니라 맞춤 전술, 용병술, 스카우팅 등 감독으로서 꼭 필요한 능력은 골고루 갖춘 감독이었다.


이렇듯 당시 찬란하게 빛났던 퍼거슨의 맨유와 현재 주춤한 맨유가 비교되어 팬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맨유도 전성기를 되찾을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이 오길 간절히 염원하면서 그리고 퍼거슨을 추억하면서 글을 마친다.

# 서보원 Editer '리즈 시절, 전성기, 그리고 비엘사'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만 사용되던 “리즈 시절”은 어느덧 “전성기”, “옛날”을 의미하게 되었다. "Leeds season"이라고 부르는 리즈 시절은 사실 한국에서만 특별한 뜻을 내포한다. 현지에서의 "doing a Leeds"는 돈은 펑펑 써 놓고 결국 강등되는 2004년을 일컫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표현과 전혀 다르다.


<BBC> 에서는 이런 한국적인 표현을 "가장 희한한 축구 용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리즈 시절은 최전성기였던 1960년대 후반이 아닌 제2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1990년대를 의미한다. 이때 앨런 스미스가 맨유로 이적해서 부진하자 "리즈 시절에는 안 그랬는데"라는 식의 표현이 밈이 된 것이다.


과거의 찬란한 유산 같았던 리즈 시절은 올 시즌, 16년 만에 프리미어리그에 복귀하면서 다시금 경신의 기회가 주어졌다. 유럽 무대를 제패하던 시절처럼 돌아가긴 어렵겠지만 확실히 과거보다 높은 위치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광인, 마르셀로 비엘사가 있다.


2018년부터 리즈의 지휘봉을 잡은 비엘사 감독은 첫 시즌부터 활약하며 화이츠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 챔피언십리그 우승을 일궈내며 프리미어리그 승격, 올 시즌에는 35라운드 기준 리그 10위를 기록했다.


까다로운 전술가인 비엘사 감독은 화끈한 공격력을 PL에서도 보여줬는데, 15승 5무 15패 득실 0(득점 53, 실점 53)로 기묘한 스텟을 기록 중이다. "모 아니면 도"인데 비결은 압박에 있었다. 압박 횟수 1위일 뿐만 아니라 상대 진영에서의 압박 횟수 역시 2위다. 덕분에 슈팅 수 리그 4위, 유효 슈팅 수 리그 5위를 기록하며 화력 면에서 빅 클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즉, 공격만큼은 리즈 시절이다. 이런 비엘사 감독에게 리즈는 2년 계약 연장을 제의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서야 입맛에 맞는 팀을 꾸리게 된 비엘사 감독은 또 다른 리즈 시절을 구현하기 위해 앨런드 로드에 잔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는 “오늘날의 리즈 시절”을 곧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석지훈 Editer 'THE GOLDEN DAYS'


ㅇ 리즈시절의 이유


리즈는 1996년 크리스 애커스 회장 취임 후 유럽의 새로운 명가 등극을 꿈꿨다. 그 꿈은 1998년에 전성기를 이룩하면서 현실이 됐다. 리즈의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98-99시즌 많은 선수를 영입하며 구단을 안정시켰고 프리미어리그의 톱 6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갑작스레 리즈를 떠났고 자연스레 그의 어시스턴트인 데이비드 오리어리에게 지휘권을 넘어갔다.


오리어리 감독은 맥페일, 우드게이트, 앨런스미스 등 리즈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다양한 유스 자원들을 기용했다. 그리고 그 시즌 4위을 차지하며 유에파컵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또한 이적시장에 많은 돈을 퍼부었는데, 호주의 비두카, 다쿠르 그리고 웨스트햄의 핵심이었던 리오 퍼디난드까지 영입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것이 이들의 리즈 시절이었다.


ㅇ 리즈의 전술


리즈의 00/01시즌 전술의 기본적인 전형은 4-4-2 형태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이어가 안쪽으로 좁혀 들어가며 우측 풀백인 켈리(밀스)를 오버랩하는 4-3-1-2의 형태를 내비쳤다. 이 과정에서 앨런스미스는 마치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뛰었고, 해리키웰은 자유롭게 플레이하는 프리롤 역할을 맡았다. 이와 더불어 양 풀백들은 항상 공격적으로 오버래핑 하였으며 배티와 다쿠르가 왕성한 활동량으로 그 둘의 남은 뒷공간을 커버했다.이와 같은 전술로 리즈는 챔스 4강까지 진출했다. 이 시즌 앨런스미스는 무려 11골과 6개의 도움을, 왼쪽 풀백인 하르테는 6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이외에 비두카는 17골로 팀내 가장 많은 득점을 뿜어냈다. 심지어 후보에는 로비킨, 브릿지 등이 있었을 정도로 막강했다.


ㅇ 져버린 장미


그렇게 리즈는 00/01시즌 챔스 4강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리즈는 5위에 그치며 오리어리 감독을 경질한다. 설상가상, 부채로 인해 팀내 핵심 선수들을 모두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라이벌 맨유에게 리오 퍼디난드까지 내주게 된다. 이로 인해 2004년 강등을 면치 못했고 홈구장 소유권까지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리즈의 전성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96년부터 약 5년간 기적 같은 동화를 쓰던 장미꽃의 마지막은 처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천의강 Editer '로저스의 레스터시티'

레스터 시티는 15/16 시즌 우승 이후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15-16시즌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고, 팀의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 감독이었던 라니에리가 경질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16/17시즌 리그 12위 기록하면서 원래의 자리를 돌아갔다. 그 이후 17/18, 18/19 시즌 모두 9위를 기록하면서 다크호스의 위치로 회귀한 모습이었다.

이에 레스터는 15-16시즌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스코틀랜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던 브랜든 로저스 감독을 선임했다. 그리고 로저스는 자신의 철학대로 레스터를 재정비했고 5위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상 로저스 체제가 확립된 지금이 레스터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저스는 레스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일까?

ㅇ 시즌 전 이적시장

시즌 시작 전 이적시장에서 매과이어를 이적시키며 방대한 영입 자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클럽 레코드를 깨고 틸레만스를 영입했다. 또한 지난 시즌 게잘이 아쉬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페레스까지 영입했다

ㅇ 대망의 시즌 시작

시즌이 시작되고 꽤 좋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유럽 대항전 진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실제로 리그 전반기에 토트넘, 아스날 잡고 사우스햄튼을 무려 9:0으로 잡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잠깐이지만 맨시티, 리버풀과 우승경쟁을 벌였을 정도다.

ㅇ 하지만 후반기 미끄럼틀

전반기에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후반기가 시작하기 전 보강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 0입에 그쳤고 일정이 빡빡해지면서 얇은 뎁스가 문제를 일으켰다. 많은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잡아야 할 경기를 놓쳤고, 빅6와의 경기에서도 완벽히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챔스권은 물론 우승 경쟁을 펼쳤는데도 말이다. 결국 후반기가 되면서 점점 미끄러지더니 5위에 위치한 채 시즌을 끝냈다.

15/16 시즌 또한 엄청났지만 19-20 시즌의 레스터는 새로운 빅클럽의 등장을 알리는 듯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완벽한 팀이었다. 레스터의 선수단, 로저스 감독의 전술 모든 게 맞아 떨어졌다. 몇몇 PL 팬들은 새로운 빅6에 레스터를 포함시켜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내비치고 있다. 이 시즌이 없었다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필자는 레스터시티의 전성기로 19/20 시즌을 뽑고 싶다.

# 정재욱 Editer '2016, The Huh'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 이는 상대 팀의 기세를 누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상대 팀에게 위압감을 주는 서포팅 중 가장 인상 깊은 서포팅을 꼽자면 단연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The Huh”일 것이다. ‘바이킹 박수’ 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응원 문화는, 2016년 유로에서 아이슬란드가 선전을 거듭하며 전성기를 누리자, 전세계 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 이는 상대 팀의 기세를 누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상대 팀에게 위압감을 주는 서포팅 중 가장 인상 깊은 서포팅을 꼽자면 단연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The Huh”일 것이다.

‘바이킹 박수’ 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응원 문화는, 2016년 유로에서 아이슬란드가 선전을 거듭하며 전성기를 누리자, 전세계 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유로 2016에서 자국 역사상 최초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예선부터 네덜란드, 터키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강팀들을 꺾는 대이변을 연출해냈다. 본선에서는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F조에 편성됐고,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과 무승부를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알렸다. 그 이후 헝가리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조별 예선을 무패로 통과했다.

이들의 16강 상대는 EPL 스타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비록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지만 특유의 집중력을 바탕으로 대이변을 연출하는데 성공한다. 우승 후보를 꺾는 이변을 보여준 아이슬란드는 8강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만나 탈락하게 되지만, 자국 역사상 첫 유로에서 8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자국 역사상 첫 유로 본선 무대에서 기적 같은 전성기를 누린 아이슬란드의 이야기는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들의 응원 문화도 주목을 받게 됐다. 아이슬란드의 원정단은 ‘바이킹 박수’라고 알려진 “The Huh”라는 응원법을 보여주었다.

응원이 시작되면 북소리를 두 번 울린 이후 응원단 전체가 머리 위로 박수를 치며 크게 “Huh” 소리를 내지른다. 박수와 함성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경기장 한 편을 가득 메운 아이슬란드의 서포터들은 동시에 이 동작을 수행하며 장관을 연출해낸다. 이런 열정적인 서포팅으로, 아이슬란드 국가대표 팀 서포터즈는 2016년 FIFA 팬 어워드 2위를 차지했다.

이 응원은 ‘바이킹 박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바이킹의 전통은 아니다. 2014년, 아이슬란드의 스탸르난 서포터들이 유로파리그 예선 경기를 위해 스코틀랜드 머더웰 원정을 떠났을 때, 머더웰 서포터들이 이 응원을 펼치는 것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아이슬란드 국가대표 팀의 응원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록 아이슬란드의 전통은 아니지만, 그들이 세계에 그들의 응원 문화를 알려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첫 월드컵이었던 2018 월드컵에서도 아이슬란드의 서포터들은 열정적인 “The Huh”을 보여주었다. 비록 월드컵 첫 승리는 거두지 못했지만, 그들의 응원은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 풋볼루션 Editer 'Invincible Fleet, 스페인의 메이저 3연패'

현대 세계 축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유율과 빌드업에 근간을 둔 채 유로 2008,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까지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차지한 팀을 알고 있는가? 2000년대 중반 수비조직력을 극대화한 전술을 타파하며 진정한 `무적함대`로 거듭났던 스페인 국가대표팀(이하 스페인)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2006 독일 월드컵까지 스페인은 이름값에 비해 큰 무대에 가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팀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2008-09시즌 초짜 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점유율 패스 축구는 세계 축구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충격적인 행보를 이어갔고, 이 시기 최고의 활약을 펼친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대거 기용한 스페인도 최고의 주가를 달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유로 08 조별리그에서 러시아, 스웨덴, 그리스와 함께 D조 묶여 3전 전승으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스페인은 지난해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맞이해 승부차기 승리를 거뒀고, 히딩크 매직을 앞세워 준결승까지 올라온 러시아를 제압해 결승전에서 독일과 맞붙었다. 비록, 독일 미드필더진의 강한 압박이 스페인의 아기자기한 패스 축구를 잘 막아냈지만, 꾸준히 배후를 노리던 스페인은 전반 33분 토레스의 결정적인 한 방으로 44년 만에 유로 우승을 차지했다.

기세를 이어 2010년 월드컵 예선을 10전 전승으로 본선에 합류한 스페인은 H조에서 스위스에 충격 패를 당했지만, 온두라스와 칠레를 잡고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토너먼트에서 난적 포르투갈, 파라과이, 독일에 1:0 신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올랐고 스페인처럼 월드컵 첫 번째 트로피를 두고 맞대결을 펼친 네덜란드와 연장전 혈투 끝 이니에스타(116`)의 천금 같은 득점으로 꿈에 그리던 FIFA 월드컵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렇게 메이저대회 2연패를 달성한 스페인의 다음 목표는 사상 첫 메이저대회 3연패였다. 그 무대는 유로 12였다. 유로 12 예선전에서 8전 전승으로 본선에 합류한 스페인은 C조에 배정돼 이탈리아, 아일랜드, 크로아티아와 맞대결을 펼쳐 2승 1무를 거두고 1위를 차지했다. 8강에서는 프랑스를 2:0으로 물리쳤고 월드컵에서 마주쳤던 포르투갈과 준결승에서 만나 승부차기 승리를 거뒀다.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만난 스페인은 여태까지 빈공에 시달렸던 것을 잊고 실바, 알바, 토레스, 마타의 연속 골에 힘입어 이탈리아를 4:0으로 대파하며 메이저 대회 3관왕을 달성했다.

축구의 모든 역사를 놓고 봐도 스페인의 전성기는 막강했다. 지금도 수많은 축구 팬들이 스페인의 전성기를 추억할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메이저대회 3연패라는 위업은 전후무후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Part 2 - Player

# 조재희 Editer '지지 않은 불꽃'

네덜란드 태생인 카윗은 어렸을 적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에레디비시의 명문 페예노르트 입성에 성공했다. 페예노르트는 네덜란드의 최고 명문팀 중 하나로, 입단과 동시에 큰 기대를 받았던 카윗은 데뷔 시즌 전 경기 출장과 더불어 20골을 기록하며 화려한 데뷔시즌을 보냈다.

이윽고 다음시즌 그의 기량은 꾸준히 발전하여 해당 시즌에만 29골을 뽑아냈고 생애 첫 득점왕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지켜보던 유럽의 여러 팀들은 그를 가만히 둘리 없었고,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의 꾸준한 구애 끝에 2006년 여름 리버풀에 입성하였다. 당시의 리버풀은 제라드를 중심으로 뛰어난 중원 장악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공격수들의 연이은 부상과, 부진 속에 득점과 관하여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카윗이 선택된 것이다.

카윗은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무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저조한 득점력을 이어 나갔다. 적은 골 수는 아니었으나 분명 그가 네덜란드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파괴력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에 베니테즈 감독은 토레스를 영입하였고, 카윗을 윙어로 배치시켜 그의 장점인 활동량과 운동 능력을 더욱 돋보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2012년 팀을 떠날 때까지 성실하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제라드와 함께 팬들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2012년 카윗은 리버풀과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한 채, 페네르바체로 팀을 옮겨 다시 한 번 그의 클래스를 증명하였고, 2015년 36살의 나이로 친정 팀인 페예노르트로 이적하였다. 노장이 되어 팀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한 번 뜨거운 불꽃을 태웠다. 왼팔의 주장 완장을 찬 뒤, 잉글랜드에서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그의 득점 본능은 다시금 되살아났고, 32경기 19골을 득점하며 제2의 전성기를 이어 나갔다.

21세기에 들어 리그 우승 경험이 없던 페예노르트는 여러 비판을 짊어진 채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이윽고 16-17시즌 리그 최종전이자 카윗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해트트릭을 달성하였고, 페예노르트는 동화 같은 우승을 차지했다. 과연 그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카윗의 성실함과 꾸준함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가장 뜨거운 불꽃으로 타올랐다.

# 김성준 Editer '임펙트 만큼은 확실했던 호나우두의 전성기'

짧은 '전성기' 동안 가장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준 선수를 뽑으라면 대다수가 ‘호나우두’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호나우두는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PSV에 이르기까지 경이로운 결정력, 뛰어난 축구지능, 강인한 신체 조건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렇듯 젊은 나이였음에도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그는 곧바로 전성기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전성기의 시작은 96-97시즌 FC바르셀로나였다. 1시즌 밖에 뛰지 못했지만 당시 바르샤 팬들은 호나우두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리그 우승은 실패했지만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49경기 47골을 넣으며 팀을 위너스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눈부신 성적 덕분에 호나우두는 20세의 나이에 발롱도르 2위, 최연소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현지 언론들은 호나우두를 '축구의 왕'이라고 칭송했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의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당시 세리에A는 내로라하는 최고의 수비수들이 즐비했고 거친 몸싸움을 자랑하여 '공격수의 무덤' 이라 불렸다. 호나우두는 그런 수비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32경기 25골로 리그 득점 2위를 기록했다. 또한 팀을 UEFA컵 챔피언에 올려 놓으며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이처럼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그의 축구 인생은 98 월드컵 우승 좌절 이후 벽에 부딪힌다. 월드컵 직후 무릎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재활센터에서 보내게 된다. 겨우 부상에서 복귀했지만 7분만에 부상 재발, 심지어 상황이 악화되어 총 2년을 재활에만 집중해야 했다.

그런 호나우두를 인테르는 포기하지 않았고 재활을 지원해줬다. 복귀 후에 세심한 출장 시간 조절까지 받으며 몸을 끌어올렸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승과 득점왕까지 차지하며 부활을 알렸다. 인테르 팬들은 호나우두가 돌아와 리그 우승을 이끌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는 결국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다.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정책의 일환으로 이적한 호나우두는 02년 10월까지 부상으로 결장했다. 하지만 복귀 이후 시즌 23골을 넣고 02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게 된다. 03/04 시즌도 24골을 뽑아내며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팀은 무관에 그쳤고 시즌 막바지에 또다시 부상을 당했다. 04/05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체중이 불어나면서 경기력도 내려가기 시작했다.

또한 경기장 안밖으로 게으른 태도를 보였고 팬들은 그런 호나우두를 비난했다. 06/07시즌 부임한 파비오 카펠로는 게으른 태도를 보이는 호나우두를 멀리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와 작별한다. 이후 호나우두는 자기관리 실패와 잦은 부상으로 내리막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호나우두가 보여주었던 임팩트는 축구사를 통틀어 가장 경이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임동근 Editer '아자르의 해맑았던 웃음'

지난 6일 스탠포드 브릿지에서 진행된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의 경기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선수가 한 명 있다. 바로 레알 마드리드 소속 공격수 에당 아자르다. 이날 아자르는 선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경기 내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후반 44분 마리아노 디아즈와 교체되었다. 결국 레알 마드리드는 이 경기에서 첼시에 0-2로 패배했고 합산 스코어 1-3의 결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속팀의 탈락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끝난 직후 아자르는 전 소속팀이었던 첼시의 수비수 퀴르 주마 선수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 사진은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을 화나게 만들기 충분했고 아자르는 엄청난 비난 끝에 결국 SNS에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아자르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이후, 꾸준한 부상과 부진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는 그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아자르는 12-13시즌부터 18-19시즌까지 첼시 FC 소속 선수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4-15시즌과 16-17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 12-13시즌과 18-19시즌 유로파 리그 우승, 14-15시즌 리그컵 우승, 17-18시즌 FA컵 우승을 이끌며 첼시에서 본인의 전성기를 일구어 냈다. 아자르는 전성기 시절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크랙이라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아자르는 첼시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21골 17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자르는 불어난 몸무게로 인해 원래의 가벼운 움직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햄스트링 부상까지 당하면서 팬들의 기대를 걱정으로 바꾸었다.

부상 복귀 후 경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파리 셍제르망과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경기에서 토마 뫼니에에게 태클을 당하며 발목에 실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아자르는 복귀와 부상을 반복하며 현재까지도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줬던 크랙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구단 최고 이적료를 갱신하면서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아자르였지만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주급도둑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아자르의 전성기가 이토록 빨리 끝난 이유는 자기관리 때문으로 보인다. 매주 경기가 있고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하는 프로 선수가 본인의 체중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프로 의식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아자르는 이번 사태로 팀 내의 입지가 불확실 해졌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의 아자르로 돌아가기 위해 본인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홍연진 Editer '아자르의 강력했던 전성기와 갑작스러운 몰락'

에당 아자르가 존재하던 첼시의 홈 구장, 스탬포드 브릿지는 첼시 팬들에게 있어서 ‘Garden Of Eden(에덴 동산)’ 처럼 행복이 끊이지 않는 장소였다. 첼시 팬들은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활약하는 아자르를 보면서 많은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자르 역시 첼시에서 행복한 추억만을 만들어 나가며, 자신의 강렬했던 전성기를 첼시와 함께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 2회, 유로파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1회를 달성했고 구단 역사앙 네번째로 많은 득점까지 뽑아내며 첼시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와 같은 눈부신 활약을 펼친 뒤 18-19시즌을 끝으로 팀과 아름다운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아자르의 행복은 여기까지 였다. 옵션 포함 약 2000억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 아자르는 지금까지도 레알 팬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누구보다 강렬한 전성기를 보냈고, 몰락도 그 누구보다 갑작스러웠던 에당 아자르,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일까?

ㅇ 한순간에 철강왕에서 유리몸으로

첼시 시절 아자르는 부상을 잘 당하지 않는 철강왕 선수였다. 프리미어리그의 수비수들은 아자르에게 거친 태클과 파울을 시도하여 그를 수비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자르는 부상이 거의 없던 선수였다. 실제로 아자르는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데뷔 시즌부터 마지막 시즌까지 언제나 리그에서 피파울 Top 5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기 부상을 당한 적이 거의 없으며, 부상으로 결장한 경기 수 역시 대부분 3경기 이내로 매우 적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이적 이후, 부상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첼시에서의 7시즌 동안 고작 14번의 부상을 기록한 반면,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2시즌만에 총 10회의 부상을 기록하고 있다.

ㅇ 고질적인 자기 관리 문제

아자르는 고질적으로 자기 관리에 소홀한 선수다. 릴 시절에는 경기 전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술에 취한 채로 경기에 뛴 적도 있었고(그 날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은 비밀이다), 그와 함께 뛰었던 선수들에 의하면 훈련 때는 항상 게으른 선수였다고 한다. 또한, 식탐이 아주 심해 비시즌기에는 체중 관리가 되어 있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이미 이번 시즌 시작 전에도 체중 관리에 실패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지단 감독이 크게 분노했다는 뉴스 역시도 있었다. 이러한 아자르의 사례는 축구 선수들에게 철저한 자기 관리가 왜 중요한지 명확하게 심어줄 것으로 보인다.

# 신중혁 Editer '아틀레티코의 장벽, 디에고 고딘'

'전성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선수가 생각나는가. 커리어 내내 전성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도 있는 반면, 반짝 활약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선수들도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철의 포백의 중심이 되어 팀에게 리그 우승 트로피를 선물하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지금은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는 한 선수에 대해 알아보자.

디에고 고딘은 2010년 8월 4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5년 계약에 기본 이적료는 800만 유로. 고딘의 영입 이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라리가의 레알, 바르샤 양강 체제를 깨트리는 다크호스로 변모하게 된다. 고딘은 데뷔 시즌부터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아틀레티코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2013-14 시즌 전 PL 이적설이 돌았으나 아틀레티코와 2018년까지 재계약을 맺었다.

2013/14시즌 아틀레티코는 리그 첫 마드리드 더비를 1대0으로 장식했고 22라운드 소시에다드를 4대0으로 대파하며 1996년 이후 처음으로 리그 1위로 올라섰다. 사실상 라리가 결승전이었던 38라운드 바르셀로나 전에서 산체스에게 실점하였으나 전반 추가시간 디에고 고딘이 가비의 코너킥을 감각적인 헤딩골로 마무리하며 동점을 만들었고, 추가시간까지 실점하지 않고 버티며 18년만에 10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챔스에서도 40년 만에 결승에 진출하며 챔스 결승 최초로 마드리드 더비가 성사되었다. 디에고 고딘이 선제 헤딩골을 넣으며 아틀레티코의 사상 첫 챔스 우승에 가까워졌으나 추가시간 라모스에게 헤딩골을 내준 뒤 연장전에서 내리 세 골을 실점하면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 뒤 고딘은 자신의 이적설에 대한 인터뷰에서 “축구는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지만, 돈을 조금 더 벌자고 애정이 깊은 팀을 떠날 수 없었다.”라고 밝히며 근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딘이 아틀레티코에 머물렀던 동안 아틀레티코는 리그 1회(13-14), 코파델레이 1회(12-13), UEFA슈퍼컵 3회(10, 12, 18), UEFA유로파리그 2회(12, 18), 스페인 슈퍼컵 1회(14) 총 8개의 트로피를 얻어냈다. 10년간 396경기에 출전하며 아틀레티코의 역사를 함께한 디에고 고딘. 그가 없었다면 아틀레티코가 철벽 같은 수비 조직과 화끈한 역습을 자랑하는 팀이 될 수 있었을까? 숱한 오퍼가 있었음에도 애정하는 팀을 위해 10년이나 헌신하고 아름답게 떠나는 선수가 얼마나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고딘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선수이다. 전성기 시절 높은 타점으로 결정적 순간마다 헤딩골을 작렬시키고 몸을 사리지 않는 수비로 끈질기게 공격을 막아냈던 디에고 고딘의 모습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Part 3 - Culture

# 김건호 Editer '9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K리그의 전성기'

21세기 초반을 뜨겁게 장식한 2002년 한일월드컵. 많은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던 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그 여름이 오기 몇 년 전, K리그에도 전례 없는 흥행이 찾아왔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미흡한 성적과는 정반대로 역대 최다 관중을 돌파한 1998년의 현대 컵 K-리그에 대하여 알려드리고자 한다.

1998년의 한국 축구 리그는 이전 상황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흥행하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전년이었던 1997년 나라에 닥쳤던 IMF 금융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이였고, 이러한 금융위기로 인하여 각 팀의 재정 상황은 좋지 못하여 전력보강에 애로사항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리그 개막 직전에 열렸던 1998년 월드컵에서의 성적이 좋지 못했던 것도 해외파 선수들이 극소수였던 당시의 K리그 시장에 악재로 작용했다. 하지만 막상 리그가 시작된 이후 K리그의 인기는 그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1998년 현대 컵 K-리그에는 10개의 팀(부산 대우 로얄즈, 전남 드래곤즈, 울산 현대 호랑이, 포항 스틸러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북 현대 다이노스, 대전 시티즌, 천안 일화 천마, 안양 LG 치타시치타스, 부천 SK)이 참여했다. 10팀 합쳐 약 211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으며, 이중 과반수의 이상의 팀이 평균 관중 1만 명을 넘기는 기염을 토해냈다. 리그가 시작한 지 약 한 달 뒤, 8월 22일에 열린 다섯 경기의 총 관중 수가 10만 명을 넘을 정도였다.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이었다.

이러한 흥행성적을 뒷받침해주는 이유야 찾으려면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해 K리그의 트로이카라 불렸던 세 선수의 활약 덕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리그에서부터 수많은 팬을 보유하였던 포항 스틸러스의 이동국, 부산 대우 로얄즈의 안정환은 그해 데뷔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홈구장의 많은 의자를 자신의 팬들로 채우며 슈퍼스타의 반열에 들어선다. 마지막으로 신인은 아니었지만, 리그 최정상급의 능력을 발휘하며 2년 전부터 K리그를 뜨겁게 만들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고종수를 필두로 1998년의 이 트로이카는 완성된다.

이러한 흥행의 역사는 2000년대에도 어느정도 이어졌지만, 2010년대는 다시금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지난 2019년, 근 10년 동안 가장 많은 관중을 기록하며 반등하는 듯했지만, 전 세계적인 전염병 코로나 19로 인해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새다.

그러니 코로나 19가 완전히 종식되는 그날, 이러한 추세가 꺾이지 않고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간절히 염원하는 바이다.

# 이현우 Editer 'PL 전성 시대와 우리의 축구'

흔히 축구에서 말하는 전성기는 20대 중후반에 있는 선수가 절정의 기량을 발휘할 때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축구 산업의 전성기는 어떠할까? 황금기 혹은 호황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재 축구 산업의 전성기는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프리미어리그(PL)가 파생시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의 규모는 얼마나 많은 돈이 유통되는 가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지금 PL은 영국에서 축구가 태동한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돈이 움직이고 있다.

프로 축구 구단의 수입은 ‘스폰서 계약 수입, 중계권료 수입, 입장료 수입’으로 구성되는데, 현재 PL은 세계 프로 축구 리그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창출하고 있다. 수입원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중계권료이다. 프리미엄화를 통해 리그의 가치를 올린 PL은 매경기마다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기대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고, 방송사와 기업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동 인구가 많은 PL에 뛰어든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축구는 어떠할까? 양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크게 성장했다. 프로 리그인 K리그1·2를 필두로, 지난해 기존의 내셔널리그와 K3리그가 통합되어 출범한 세미프로 리그인 K3·K4리그까지. 아마추어 리그인 K5~7까지 포함하면 1부 리그부터 7부 리그까지 한국형 디비전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 속의 질적인 성장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실상이 조금 다르다.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 혹은 부분 유관중으로 리그를 진행하기 전인 2019 시즌에 승강제 도입 후 처음으로 230만 관중을 넘기며 이전 시즌들에 비해 흥행 바람을 맞긴 했으나, 관중 숫자의 절댓값만 봤을 때는 아직도 부족한 상황이다. 관중이 부족하다 보니 방송사와 후원 기업들의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 K3·K4리그는 ‘한국 축구의 허리’라는 명목으로 거창하게 시작하긴 했으나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되거나 해체 위기를 맞는 팀들이 발생했다.

한국 축구 산업의 전성기라고 피력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기 위해선 질적인 성장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질적인 성장에는 구단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축구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 유럽의 축구는 팬들로부터, 즉 아래부터 시작되었다. 반면 한국 축구는 여러 이해타산적 배경으로 위에서부터 구단이 만들어졌다. 축구 산업 시작의 뿌리부터 다른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우리 토양에 맞게 뿌리를 내려야만 대한민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Part 4 - Fashion

# 정채건 Editer '축구팀의 패치가 가진 의미에 관하여'

축구 유니폼에는 보통 엠블럼과 스폰서,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 등이 배치된다. 이외에도 선수들의 백마킹과 참여하는 대회 혹은 그 대회와 관련한 다양한 패치들도 붙는다. PL, 라리가, 챔피언스리그, 분데스리가, 월드컵 등 해당 팀이 참여 중인 대회에 맞춰 다른 패치가 붙는 것이다. 이 차이는 유니폼 컬렉터들에게 꽤나 유쾌한 컬렉팅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패치들은 그 팀의 위치를 나타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프리미어리그 패치가 금색으로 돼 있는 경우, 엠블럼 위에 별이 새겨진 경우, 가슴에 피파 클럽 월드컵 로고가 붙어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전 대회 혹은 시즌 우승팀에게는 이렇게 남들과는 다른 패치가 붙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는 단순하게 전 대회의 우승팀을 예우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팀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09-10 시즌과 11-12시즌 바르셀로나의 가슴팍에 붙어있던 클럽 월드컵 우승 패치는 팀의 위용을 더한다. AC밀란의 12-13시즌 유니폼에는 스쿠데토(세리에A 우승 자격으로 얻는 이탈리아 국기 무늬의 패치)와 챔스 7번 이상 우승을 기념하는 트로피7위너스패치는 그간 밀란이 거둔 눈부신 성과에 보내는 뜨거운 박수갈채 같은 느낌을 준다.

챔피언스리그의 팀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경우, 5회 이상 혹은 3회 연속 이상의 우승팀의 오른팔에 부착되는 위너스 패치를 두 조건 모두 충족한 상태로 부착하기도 했었다. 현재 그들은 빅이어(챔피언스리그의 우승컵)과 함께 12번의 우승을 상징하는 12가 새겨진 패치를 부착함으로써 그 어떤 팀에서도 느끼기 힘든 위용을 뿜어낸다. 13-14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팔에는 5번의 우승을 상징하는 위너스 패치와 피파 클럽 월드컵 위너 패치가 함께 부착돼 그들이 지난 시즌 거둔 놀라운 성과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UEFA에는 이러한 종류의 공식 패치들을 뱃지 오브 어너 (Badge of Honour)라 부른다.

앞으로 나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네 삶에는 어쩌면 이전의 우리가 거둔 성과들을 돌아볼 여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니폼은 그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들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팀들이 거둔 성과를 그 다음 시즌에도 기억하게 해준다. 이것들은 각 팀들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고,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 그들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하는 한 편에는 우리가 거둔 성과들에 대해 스스로에게 좀 더 자랑스러워 해도 괜찮지 않을까.


Part 5 - History

# 박수용 Editer '화려했던 밀란 제너레이션의 명과 암'

ㅇ 화려했던 AC 밀란의 전성기

최근 AC 밀란은 부진한 성적과 더불어 재정적으로도 우수한 상태가 아니기에 높은 평가를 받는 팀에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로쏘네리 군단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밀란 제너레이션이라 불렸을 정도로 당대 최강은 물론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밀란 제너레이션이라 불렸던 사키와 카펠로 체제에서의 9년 동안 AC 밀란은 다섯 차례의 세리에 A 우승과 세 차례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전술사적으로도 위대한 팀이었는데, 토털 풋볼의 기초에서 더 나아가 최초로 체계적인 압박 체계를 연구했으며 압박 축구를 선보였다. 이는 현대 축구 전술에 교과서가 됐을 정도다.

이렇듯 스포츠 역사에서는 위대한 팀으로 손꼽히지만, 여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무작정 빛나기만 하는 팀은 아니었다.

ㅇ 추악했던 3S 정책에 이용당하다.

그럼 AC 밀란의 어두운 면은 무엇일까? 이를 해부하려면 AC 밀란이 전성기에 오른 축구 외적인 요인을 파악해야 한다.

당시 AC 밀란은 과거에 보여줬던 좋은 모습을 잃고 토토네로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되며 강등을 당했다. 다른 세리에 구단들이 나름대로의 황금기를 보내던 시기에, AC 밀란은 재정난으로 승강을 반복하며 파산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때 백마 탄 왕자처럼 밀란을 구제한 사람이 밀라노 방송계의 재벌 베를루스코니였다.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사업가였으며 총리까지 꿈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지도를 올릴 도구 중 하나로 스포츠팀을 활용할 계획을 세웠고 그 대상은 기울어가는 AC 밀란이었다. AC 밀란을 인수한 베를루스코니는 파르마에서 작은 기적을 쓴 명장 사키와 훌륭한 용병인 오렌지 삼총사를 영입해 세간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자연스레 자신의 명성도 상승시켰다.

비록 자신을 후원하던 정치인들이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로 몰락했으나, 베롤루스코니는 언론을 활용함과 동시에 AC 밀란의 성공을 이용해 자신을 더욱 홍보했다. 그리고 총리에 도전하기 위해 이탈리아 클럽 최초의 전관왕을 목표로 92-93 시즌 대대적인 영입에 나선다. 단 세 명의 용병만이 출전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세계 정상급 선수를 어렷 영입했고 백업 자원 또한 화려했다.

이렇게 3S 정책을 적극 활용한 베를루스코니는 목표했던 전관왕에는 실패했지만, 총리에 당선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북부연맹과의 연정에 실패하며 결국 9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설상가상, 반등을 다짐했던 다음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이에 따라 1996년 이후, AC 밀란에 대한 투자도 줄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자금을 AC 밀란의 구단 자금에서 충당했다. 돈이 부족하면 선수를 팔았고 정치 스캔들이 날 때 입막음을 하고자 선수를 영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미성년자 성매매와 권력남용 혐의로 정치적으로 몰락했으며 결국 AC 밀란은 용홍리에게 매각됐다.

ㅇ 마탄을 선택한 사수의 결말

결국 베를루스코니의 부패함과 무능한 정치로 인해 이탈리아는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를 받아야 했다. 경제 성장이 정체되었고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AC 밀란은 본의 아니게 베를루스코니의 3S 정책의 한 축을 담당해 이탈리아 전체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한 대가로 AC 밀란은 막대한 부채를 지고 몰락했다.

스포츠적 관점에서는 전성기였지만 사회적 관점에서는 최악의 시기라는 모순된 상황을 맞았다. 팬들은 밀란의 선전에 행복했지만 줄어드는 가계 수입에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받았다. 결국 밀란은 화려한 전성기만을 남긴 채 구단의 몰락과 팬들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다.

마치 "일곱 발의 마탄 중 여섯 발은 막스가 원하는 대로 날아가지만, 마지막 한 발은 악마의 마음대로 날라간다."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다시는 밀란과 같은 불행한 스포츠팀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그란데사커 Editer '펠레로 알아보는 축구의 빛나는 순간들'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 우리에게 "펠레(Pele)"로 알려져 있는 그는 축구의 수많은 상징적인 순간을 이룩해왔다. 이 글에서는 펠레가 축구에 어떤 것들을 남겼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서 말이다.

펠레는 1940년 브라질의 바우루에서 태어났다. 작은 소년이었던 펠레는 "마라카낭의 비극"(1950년 월드컵 결승 브라질이 우루과이에게 2대1로 패배한 사건.)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축구선수를 꿈꾼다. 이 눈물은 이후 맞게 될 위대한 역사의 신호탄이 아니었을까?

ㅇ 슈퍼스타의 탄생

펠레는 1956년, 브라질의 산투스 FC에 입단한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이 창설된다. 그리고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여 당대를 풍미했던 헝가리 대표팀, 일명 "매직 마자르"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1958년, 펠레는 팀의 막내이자 10번으로 월드컵에 참가한다. 그는 4경기 6골 2AS를 기록하며 실버슈와 실버볼을 수상했다.

그리고 4년 후, 지난 월드컵과 리그에서의 활약으로 이미 역대급의 선수가 된 펠레는 1962년 월드컵에 참가한다. 하지만 그는 조별리그에서 부상을 당해 남은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팀은 가린샤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이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 시점에서 유럽은 에우제비우의 벤피카가 유러피언컵 2연패를 성공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ㅇ 역대 최고의 선수에 다가가고 있는 펠레

월드컵 2연패 이후, 펠레는 곧바로 산투스 FC를 이끌고 "축구 역사상 첫 트레블 "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그 다음 해에도 남미의 챔피언스리그 격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성공하며 팀의 최전성기를 이끈다.

펠레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축구 전술의 전성기였다. 네레오 로코의 밀란과 "카테나치오의 왕",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는 카테나치오 전술로 유럽을 제패하였다. 또한 잉글랜드의 "알프 램지" 감독은 "Wingless Wonders" 전술(4312 또는 4132 포메이션.)로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을 이끈다.

ㅇ 펠레,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펠레의 전성기는 곧 남미 리그, 브라질 리그, 그리고 셀레상의 전성기였다. 그 수많은 순간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70년 월드컵의 펠레였을 것이다. 1970년의 브라질은 역대 최강의 팀이라고 불린다. 소속팀에서 팀의 중심이었던 선수들인 토스탕, 히벨리누와 같은 선수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펠레는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3번째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축구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화려했던 황제 대관식이 끝난 후, 세월을 무시하지 못한 펠레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 시점, 리누스 미헬스가 완성시킨 토탈 풋볼 전술로 축구계는 또 다시 들썩이고 있었다. 또한 당시 축구계를 양분했던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펠레가 산투스 FC를 떠나는 시점인 1974년, 월드컵 결승에서 팀의 주장이자 사령관으로 만나게 되며 라이벌리의 정점을 찍는다.

펠레는 정든 산투스와 작별하고 NASL(미국/캐나다 리그)의 뉴욕 코스모스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펠레는 또 다시 전설을 쓴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알리며 에우제비우, 조지 베스트, 크루이프, 베켄바우어 등의 스타들이 NASL로 집결하게 한다. 미국 축구의 전성기를 일구어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 펠레는 축구화를 벗었지만 아직도 축구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비록 더 위대한 선수가 나타날지언정 펠레의 유산과 '축구 황제' 칭호는 영원할 것이다.


Part 6 - Rule

# 오성윤 Editer '개정은 또다른 전성기를 부른다'

오프사이드는 과거부터 꾸준히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감자였다. 최근에는 국내, 해외 가릴 것 없이 오프사이드에 관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심판의 재량에 관해 물음표를 달기도 하고, 격할 때에는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프사이드가 없었다면, 축구는 그저 소수의 인원들이 즐기는 마이너한 스포츠가 됐을지도 모른다.

FA는 당시 유행하던 소위 `뻥축구`를 막기 위해 `볼을 받을 공격자와 상대 골라인 사이에 상대 선수 ‘3명’ 이상이 존재해야 볼을 받을 수 있다`는 명확한 룰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1925년 새로이 개정된 오프사이드 규정은 훗날 축구계를 뒤흔들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개정 전 거의 모든 클럽들이 애용하던 `피라미드 2-3-5 포메이션`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허버트 채프먼에 의해 창안된 일명 `WM 포메이션`이라 일컬어지는 3-2-5 포메이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허버트 채프먼이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비를 간과하고 공격만을 중시하던 당시의 축구 문화를 증오했던 채프먼은 피지컬만을 이용한 크로스 플레이가 아닌 미드필더를 적극 이용하면서 수비에도 비중을 둘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때만 해도 채프먼은 자신이 일으킬 미래의 영광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채프만은 오랜 고민 끝에 3백의 시초가 될 `3-2-5`라는 새로운 포메이션을 창안해 아스날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된다. 채프먼의 과감한 도전은 아스날의 1차 전성기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축구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채프먼의 3-2-5 포메이션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스날의 1차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를 직접 본 잉글랜드 클럽들은 3-2-5 포메이션을 애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3-2-5 열풍은 잉글랜드에서 그치지 않았고, 세계로 뻗어 나가며 여러 명장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불어넣는 포메이션의 뼈대로 자리 잡았다. 3-2-5 포메이션이 기초가 되어 MM, 3-4-3, 3-3-4 등의 포메이션이 파생되었을 정도였다.

당시 오프사이드의 개정은 그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다잡는 용도였테지만, 이는 나비효과로 이어져 아스날이라는 한 팀의 전성기를 만들었고 더 나이가 축구라는 한 스포츠의 최전성기를 이끄는 시발점이 되었다.

# 이경민 Editer 'k리그 u22세 출전 규정 그리고 한국 축구'

자국 리그의 전체적인 수준 향상은 그 나라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며 리그의 발전은 그 나라의 전력 강화, 즉 전성기를 이끈다. 리그의 발전을 위해선 지속적인 전력 유지와 강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새로운 얼굴들의 등장을 필요로 한다. 최근 K리그에선 K리그의 발전과 더불어 한국 축구의 발전 그리고 전성기를 위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간 K리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던 22세 이하 의무 출전 규정이 코로나로 교체 카드가 5장으로 늘어남에 따라 변경된 것이다.

해당 규정 변경은 리그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단숨에 K리그 최대의 이슈로 자리 잡았다. 다소 복잡한 규정 변경으로 인해 많은 구단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루었고, 여러 구단들이 U22세 선수들을 선발 출전시켰다가 전반 초반에 교체하는 등 기용을 최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라지만, 비정상적인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면서 해당 규정이 실효성이 있는지, 코로나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단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닌지 많은 찬반 여론들이 형성되고 있다.

부정적인 시선도 있고 분명 형평성에 어긋나는 부분들도 있지만 해당 규정은 처음 신설된 2013년 이후 K리그와 한국 축구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송민규, 정승원, 이동준, 이동경 등의 여러 젊은 선수들이 이 규정으로 인해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 할 수 있었다.

구단들 또한 유망주들이 성장함에 따라 구단의 전력 강화 및 리그 수준 향상, 프랜차이즈 스타 발굴 등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지속된 유망주들의 성장과 등장으로 인해, 연령별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들을 거둘 수 있었고, (2019 U20 월드컵 준우승 등) 이는 연령별 대표팀을 넘어 A 대표팀에 안정적인 세대 교체로 이어졌다.

특히 2020년 AFC U-23 챔피언십 4강 호주와의 경기 전, 호주 SBS 방송국은 K리그의 22세 이하 의무 출전 규정이 한국팀의 전력 강화로 이어졌다며 규정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다소 강제성을 가지고 있지만 해당 규정은 K리그와 한국 축구의 유망주 육성, 전력 강화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은 복잡한 규정이라는 반발을 낳을 수 있다. 분명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해당 규정은 K리그와 한국 축구의 전체적인 성장, 발전을 위한 도전적인 시도로 인식되어야 하며 해당 규정이 더욱 안정적이고 발전된 모습으로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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