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록 습관, 2017년 남미 여행
엄마의 여행은 계획적이다. 동기는 엄마의 목마름에서 시작해서 모든 일정은 온라인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한다. 2017년 엄마는 남아메리카 나라들을 여행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당연히 자유여행.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갈라파고스 섬, 페루 마추픽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아르헨티나 이구아수 폭포 등을 계획했다. 네팔 안나 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험한 여행일까? 딸 입장에서는 치안이 불안한 남미 여행이 내심 못마땅했다. 못 말리는 우리 엄마는 여행 준비로 몇 달을 설레었다. 엄마는 구글 지도를 컴퓨터로 펼쳐보며 여행 동선을 짜고 그에 맞는 숙소를 에어비엔비 혹은 합리적인 가격의 호텔을 예약하는데 이번 여행은 남미 국가들 간의 이동을 비행기로 해야 해서 로컬 비행기 예약사이트에서 비행기 티켓까지 직접 예약을 했다고 한다. 로컬 비행기 예약사이트는 물론 스페인어였고 구글 트랜슬레이트 사이트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며 시간을 상상해 보고 맞춰서 예약하는 열정을 가진 우리 엄마. 이분이 1956년생 우리 엄마이다.
언젠가부터 신비한 곳으로 각인되어 목말라하던 그곳. 마치 우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져 절대로 올 수 없을 것 같던 그곳에 지금 내가 있다. 그리고 누구든 찍는 바다사자 사진으로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린다. 인천공항을 떠나 LA에 내려 공항 근처 무료 픽업 가능하고, 조식(이라 해봤자 차가운 빵과 우유, 커피, 시리얼 정도지만) 포함 100불 미만의 호텔에서 일박. 새벽에 일어나 다시 항공편으로 휴스턴 경유, 키토에 자정에 도착하여 역시 호텔서 제공해 준 택시로 공항 인근 호텔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또 비행기 버스 배 버스를 갈아타며 이박 삼일 만에 도착한 꿈같은 갈라파고스 산타크루즈섬. 그러나 너무 덥다. 숨 막힐 정도로 덥다. 선량하게 생긴 숙소 주인이 조심스럽게 에어컨 절약을 얘기하길래 흔쾌히 오케이 했건만 밤새도록 끌 수 없을 만큼 덥다. 육십여 년을 에어컨 없이 살고 있을 정도로 그 바람을 싫어하는데 지금 새벽 세시. 저 바람 없이는 못 견딜 것 같다. 이곳이 지상낙원이라고? 서둘러 나가 봤던 부둣가는 자연을 지킨다고 공항서부터 호들갑스럽던 짐 검색이 무색하게 자연스럽지 않다. 여느 동남아처럼 적당히 번잡하고, 어설프다. 깊어가는 밤에도 깔깔대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만 새삼 눈에 들어온다. 언제부터 우리의 밤엔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걸까? 기대했던 키오스크 거리에서의 시푸드도 그저 그랬다. 부채로 파리 쫓는 여인의 손 밑에 놓여있던 붉고 커다란 물고기가 반으로 나누어져 매운맛과 마늘소스로 버무려져 요리가 되었지만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그때부터였나? 갑자기 이 길고 힘든 여정에 회의가 든 것이? 한 달 여정에 고작 사흘째인데 남편은 가는 곳마다 여길 왜 왔냐고 다그친다. 아직 도착도 안 한 거라고 대거리했는데 도착한 첫날 갑자기 자신 없어진다. 백 퍼센트 나만을 위한 여행이라며 피곤해하더니 그렇잖아도 두툼한 입술이 설면 세 근은 되게 부풀어버렸다. 내일은 땡볕에 사십 분을 걸어야 한다는 또 어투가 베이에 갈 예정인데 얼마나 또 투덜거릴까? 바닷속에서 노는 거 정말 싫다는데 더운 그늘에서 앉아 짜증만 내면 난 참을 수 있을까? 젊은이들이 다이빙하는 곳을 잘 못 온 건 아닐까? 이곳은 바닷속 구경이 백미라 하여 스노클링 투어를 한 번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절대 물엔 안 들어간다 해 이미 포기했다. 그러나 해변 스노클링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물안경도 챙겨 왔는데 해변가가 깊어서 한 번도 못 들어가는 건 아닐까? 앞으로 일정 중 힘들일 이 좀 있을 텐데 순전히 쉬기로 한 이곳부터 벌써 삐끗하면 어쩐다? 이번 여행은 평소 여행 계획하고 다르게 힘들고 신경 쓰였다. 미리 완벽하게 모든 일정을 세우고 예약하고 떠나야 하는 못된 성미 때문에 한 곳이라도 삐끗하면 전 일정이 망가질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게다가 고산증과 치안이 늘 걸린다. 무엇보다도 준비 중에는 방관자 입장이다가 현지에 도착하면 엄청 신나 했던 남편이 이번엔 유난히 지치고 시큰둥해서 또 걸린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여행인데. 얼마나 그리던 남미 여행인데. 아자아자 아자바 힘내자. 많은 사람들의 로망 천국이라는 이곳에 와서 이게 웬 돌 맞을 소리인가? 힘내서 즐기자 다시 못 올 이 귀한 시간들을.
엄마의 여행일지 중 발췌
투명한 코발트 빛 바다를 건너가면 작은 맹그로브숲을 품은 아담한 바다가 나타난다. 바위가 방파제가 되어 파도도 없고 수심이 낮아서 안전한 스노클링 포인트. 우리 같은 노약자(?)와 어린이들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그리고 물속엔 무려 상어 떼가 있다. 아기 상어 떼. 게다가 더위에 지친 이구아나도 들어와 헤엄을 친다. 허리정도 오는 물속에서 형형색색의 꼬마 열대어와 아기상어와 이구아나들과 어울렸다. 여기가 꿈에 그리던 갈라파고스다. 맹그로브 그늘은 온통 이구아나 차지다. 염치 불고하고 이구아나들 사이에 끼어 누워 깜박 졸았다. 화가 난 그중 한 놈이 침을 뱉었지만 그늘 이라곤 여기밖에 없으니 신세 좀 지겠노라 굽신거렸다. 하늘과 구름까지 예뻤던 또르투가베이가 벌써 그립다. 갈라파고스는 물속 천국 이라더니 꼭 깊은 물속 스노클링 투어를 나가지 않더라도 부근 바닷가에서 놀 거리도 충분한 것 같았다. 돌아올 때는 수상택시를 타고 돌아 오려다 눈에 띄지 않아 그냥 또 걸었다. 더웠지만 상쾌했다.
엄마의 여행일지 중 발췌
엄마는 여행 전에 기록하고 여행 중에 기록하고 여행 후에 기록한다. 남미 여행도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모든 숙소와 비행기, 일정 등을 기록하고 여행 중에도 블로그에 생생했던 느낌을 남기고 후에도 정리해서 기록한다. 엄마가 결혼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기록하는 가계부도, 나를 낳고 쓴 육아일기도, 여행 일지도 모두 남겨 놓았는데 이것이 이토록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지금 글을 쓰며 경험으로 깨닫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책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외쳐보지만 그 무엇보다 진짜 스승은 제일 가까이 나의 엄마가 써 놓은 모든 기록들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남기는 엄마의 이야기도 훗날 엄마에게 드릴 선물이 될 것이다. 딸에게 자신의 인생을 기록해 놓은 책을 선물 받는 엄마가 몇이나 될까?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엄마의 많은 에피소드를 엮어 완성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 상상만 해도 설렌다. 요즘 내가 설레는 이유를 만들어 준 엄마에게 감사하며 하루빨리 작은 보답을 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