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것을 다시 붙잡기 시작했다.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고, 하루에 약만 챙겨 먹으면 되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처음에는 그게 선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곧 알게 됐다. 이 시간은 가끔 독이 된다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이 왔다. 불안은 늘 한가할 때 더 부지런했다. ‘앞으로는 어쩌지’, ‘이 상태로 괜찮을까’, ‘나는 왜 이렇게 멈춰 있지’ 같은 생각들이 시간표도 없이 들이닥쳤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이 시간을 그냥 두면 안 되겠구나. 무언가를 해야겠구나. 단, 잘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했던 일을.
어린 시절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한때는 화가가 꿈이었고, 꽤 진지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라는 현실적인 단어 앞에서 그 꿈은 일찍 접혔다. 접었다기보다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나는 커서 미술관에 가는 사람이 됐다.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보는 건 계속 좋아했다. 그래서 다시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아주 오랜만에, 아주 조심스럽게.
막상 시작해보니 그림은 생각보다 훨씬 노동이었다. 감성적인 취미를 기대했는데, 현실은 거의 현장직에 가까웠다. 물감을 짜고, 붓을 씻고, 물통을 갈고, 드라이어로 물감을 말리고, 다시 붓질을 하고. 어떤 색을 쓸지 계속 고민해야 했고, 어깨와 팔은 금세 저렸다. 내 상체만큼 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 동안 잡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손이 바빴고, 눈이 바빴고, 머리는 색깔과 구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그림을 봤을 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뻔했다. 잘 그려서가 아니라, 끝까지 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 이래서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 다음에는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 책을 사서 읽었다. 유명한 그림과 화가들에 대해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거의 몰랐다는 것도. 그 무지가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좋아서 들여다보는 정보들은 생각보다 사람을 가볍게 만든다.
미술관에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작품을 보고, 설명을 읽고, 도슨트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잡생각은 줄어들었다.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머리가 바쁘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나에게 조용한 운동장 같았다. 뛰지는 않지만, 멍하니 서 있지도 않는 곳.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불안은 늘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다. 많이 지치고 힘들다면, 꼭 거창한 목표 말고, 예전에 좋아했던 것을 한 번 떠올려보라고. 잘하지 않아도 되고, 끝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취미는 나를 대단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대신, 내가 아직 살아 있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주었다. 그 정도면, 불안을 견디는 데 꽤 쓸모 있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