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치지 않았다.

약함에 대한 재발견, 가벼운 매듭 하나.

by 김단아

어느 날부터 나는 내 병들을 한 단어로 묶어보기로 했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폐소공포증. 이름만 나열해도 숨이 턱 막히는 단어들이었다. 어디 하나 가볍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은 꼭 같이 다녔다. 마치 MT 갈 때 차에 함께 타야 하는 4인 1조처럼. 빠지는 법이 없었다. 서로 얽혀 있어서 더 복잡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네 가지가 한꺼번에 내 안에서 깃발을 흔들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아, 이제 진짜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와중에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어떻게든 오늘을 통과해야 했다. 삶은 늘 그랬다. 망한 것 같아도 출근 시간은 오고, 배는 고프고,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무거운 이름들에 내 식대로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 ‘가벼운 매듭.’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매듭이라고 해서 꼭 오늘 다 풀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릴 적 신발끈이 너무 꽉 묶여 안 풀릴 때, 그냥 그대로 신고 다닌 적이 있다. 걷다 보면 느슨해지고, 느슨해지다 보면 언젠가 스르륵 풀리기도 했다. 그걸 나중에,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삶에도 그렇게 걸어다녀야 풀리는 매듭이 있다는 걸.


불안도 꼭 그랬다. 극복하려 할수록 커졌고, ‘없애야 해’라고 달려들수록 없애지 못한 나 자신은 더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요즘 나는 마음속 매듭을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한다. 풀려고 애쓰지 말고, 당장 잘라내려 하지도 말고. 그냥 오늘은 이대로 두자고. 매듭을 풀지 않아도, 삶은 흘러가기에.


신기하게도 그렇게 마음을 놓자, 정말로 마음이 조금 놓였다. 거대해 보이던 공포와 두려움이 가끔은 별거 아니게 느껴지는 날들이 생겼다. 여전히 귀찮게 굴고, 예고 없이 찾아와 심장을 두드려 정신을 쏙 빼가기도 했지만, “또 왔네. 친구야.” 정도로 받아칠 수 있는 날도 생겼다. 싸우지 않으니 덜 지쳤고, 덜 지치니 삶을 다시 살 힘이 아주 조금씩 돌아왔다. 의연해진다는 건, 멋지게 이겨내는 게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그냥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이 병들이 가장 무서웠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건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무 이유 없이 무서워질 때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이거 정상 아니야.’
‘나 지금… 좀 이상한 사람 된 거 아냐?’
‘혹시 나만 고장 난 건 아닐까?’
‘이러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시작되면 공포는 두 배가 됐다.


불안이 병이라서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 상태가 ‘나’라는 사람 자체를 망가뜨릴까 봐, 그게 무서웠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지,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 아닐지. 그 두려움은 밤마다 조용히 찾아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때까지 나는 ‘약하다’는 말과 ‘미쳤다’는 말을 같은 서랍에 넣어두고 살아왔던 것 같다. 흔들리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고, 울컥하는 사람은 관리 못하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숨기려 했고, 더 괜찮은 척, 멀쩡한 척했고, 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국, 숨이 막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고 조용한 목소리가 속에서 말했다.

“넌 약해진 거지, 미친 게 아니야. 불안해진 거지, 고장 난 게 아니야.”


우리는 미치지 않았다. 그냥 너무 오래, 너무 성실하게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늘 “괜찮다”고 대답해왔던 사람들.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들. 약함을 인정하자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강해야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꼈다.


여리고 약한 상태에서도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조금 느릴지라도, 조금 서툴지라도, 그래도 살아갈 수 있었다. 회복이란 어쩌면 ‘나는 강해야 한다’는 환상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건 없다. 영원히 힘든 것도 없다. (영원한 사랑만 있을 뿐… 이라고 믿고 싶다.) 다만 분명한 건 이것이다. 지금 이 상태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불안한 상태로도 괜찮은 하루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요즘의 나는 이렇게 산다. 불안이 오면 쫓아내려 애쓰지 않는다. 약해진 나를, 지쳐버린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오늘은 불안한 상태로도 괜찮은 하루라고, 이 정도면 잘 버틴 하루라고 말해준다. 불안을 없애지 못해도,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 매듭을 풀지 않아도 삶은 흘러가고, 조금 느슨하게 살아도 시간은 제 할 일을 한다.


‘약한 채로 살아가는 하루’도 충분히 인간적이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게 된 나 자신이,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단단해졌다는 사실이— 뭔가 좀, 괜찮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나는 아주 작은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읽던, 만화책의 글귀 ㅡ 위로가 되어 찍어두었다.


이전 06화가장 솔직한 질문, '왜 살아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