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했던 불안/공황장애의 신호들
지오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나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여섯 살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기점으로 우리 집은 가난해졌다. IMF라는 녀석이 골목까지 들어와 다녀간 뒤, 가난은 제법 오랜 손님처럼 눌러 앉았다. 중고등학교 내내 학비와 급식비가 전액 면제였고, 나는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썼다.
가정도 평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폭력은 늘 예고 없이 나타났고, 예고 없이 사라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유는 ‘그냥’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야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가 싸대기와 발길질을 퍼부었다. 그날은 그냥, 그런 날이었다. 울면 안 되는 날이었고, 말하면 안 되는 밤이었다. “울면, 어디 가서 말하면 죽는다”는 말은 거의 구호처럼 반복되었고, 그래서 나는 울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래도 눈물은 났지만. 그래서였는지 발길질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폭력을 이야기하면 언니와 엄마도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던 날들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학교에서 ‘참 밝은 아이’로 통했다. 누가 봐도 쾌활했고, 감자칩 하나를 나눠주면 감자밭을 통째로 돌려줄 것 같은 아이였다. 지금 돌아보면 일부러 더 밝게 웃었을 수도 있다.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원래 조금은 햇살 같은 아이였던 것 같다. 아침마다 눈을 뜨는 게 좋았고, 급식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신나는 이벤트였으며, 친구의 MP3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세상이 잠깐 멋져 보이기도 했다. 우리집 형편을 아시기에 교사용 문제집을 슬쩍 밀어주시던 따스한 선생님들도 계셨고, 세상은 완전히 나쁘기만 하진 않았다.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처럼 언젠가 나에게도 잘생긴 남자친구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렇게 아주 조금은 순수하고 아주 많이 낙천적으로 자랐다.
대학에 가면 인생이 달라질 줄 알았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남자 셋 여자 셋이 펼치는 시트콤 같은 삶이 펼쳐질 줄 알았고, 누군가가 내게 맥주를 마시다가 고백이라도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남자 셋 여자 셋'보다 '진짜 사나이'에 가까웠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내 시험보다 학생들의 시험이 더 중요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무언가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일념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며 고시 공부에 도전했다. 삼 년을 책상 앞에 앉았다. 결과는 뭐, 예상 가능하다. 실패였다. 세 번의 계절이 바뀌고 졸업장을 들고 나왔을 때,세상은 차가워져 있었고, 취업 시장은 나를 반기지 않았다.
간신히 IT 중견기업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가장 중요한 건 연봉이었다. 연봉은 내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동앗줄 같았고, 그것을 올리기 위해선 이직이 필요했고, 이직을 위해선 실적과 자격증, 평가까지 챙겨야 했다. 정말 뭐든 했다. 까라면 깠고, 더 까라면 더 깠다. 그렇게 이직을 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스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승부를 걸 수 있는 건 노력과 근성, 그리고 밤샘이었다.
새벽 2시에 퇴근하고 새벽 5시에 다시 출근했다. 금요일 밤엔 회사 여자 휴게실에서 자고 토요일 아침 회사에서 눈을 떴다. 사람들은 내가 회사에 사는 줄 알았다. 그럴 만했다.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연봉도 쑥쑥 올랐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야근 중 창밖 옥상이 보였고, 아주 잠깐이지만, 정말 스치듯 ‘죽으면 좀 잘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 나 지금 위험하구나’ 싶었다.
며칠 후 출근길 택시 안, 터널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저려왔다. 당장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해보려 했지만 터널 안이라 신호는 없었고, 머릿속은 소용돌이쳤다. ‘지금부터 뛰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러면 출근은 어떻게 하지?’ 그날 그 터널은 이상하게 길었다. 그때는 몰랐다. 공황장애라는 걸. 과호흡이라는 걸. 그냥, 내가 좀 예민한가 보다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내 몸이 보내온 첫 번째 경고였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했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과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아이도 가졌다. 임신 중에는 하루 다섯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아이보다 내가 더 잘 자라기도 했다. 출산 당일, 제왕절개 수술을 기다리며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있었을 때였다. 빨간 시계, 묶인 손과 발, 분주한 발소리들. 갑자기 다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숨이 안 쉬어져요.” 라고 소리쳤고, 마취과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잘 거예요.” 그 손의 온기 덕분에 나는 무사히 잠이 들었고, 곧 아이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사랑받은 기억 없이 자란 내가, 한 생명을 품고 키우게 되었다.
낳으면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됐다. 아이가 잘 자고 있을 때도 '혹시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잠들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탄 차가 정차했을 때, 신호등 하나에 온몸이 얼어 붙는 경험도 했다. 신호등이 떨어질 것 같아서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어지럽고, 가슴은 조금씩 조여오며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두 번째 신호였다. 이번엔 꽤 분명하게. 내 마음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말하는, 나를 돌보라고 외치는 신호.
하지만 나는 또 무시했다. 육아도, 살림도, 일도 완벽하진 않아도 잘해내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부족한 것 없이 해주고 싶었다.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내가 겪었던 가난은 아이는 겪지 않게 하고 싶었다. 폭력이나 슬픔, 그러한 것들로부터 최대한 이 아이를 멀리 두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사랑을 듬뿍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방법은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몰랐기에.
하지만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는 예고 없이, 교통사고처럼 내 삶을 들이받았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