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장애, 공황장애의 친구들

우울증과 무기력 그리고 대인기피증.

by 김단아

처음으로 방문한 정신과, 처음으로 먹어본 다양한 색깔의 알약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나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처럼 약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에는 약효가 들지 않았다. 불안과 공황이 휩쓸고 간 날들의 기억이 공포처럼 남아 나를 잠식했고, 그 끝에서 나는 우울증과 무기력증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대인기피증이라는 이름까지, 마치 마트에서 파는 1+1처럼 따라왔다.


처음엔 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이건 선물 같은 거라고, 너무 오래 애써온 삶에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일 거라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유효기간도 있으니 곧 흘러가겠지. 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떠나는 남자친구의 옷자락을 붙잡듯, 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감정을 붙잡아보려 애썼다. 이 긴 터널을 지나면 분명 교훈이 있을 거라고, 내 삶과 감정도 더 풍부해질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감정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무기력해졌고, 더 우울해졌다.


누군가를 만났다가 또다시 심장을 부여잡게 될까 봐, 과호흡이 올까 봐, 출구를 찾느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게 될까 봐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다. 병명을 정확히 말하지 못했던 지인들에게는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약속을 미뤘고, 새로운 약속은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매일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예쁜 카페에도가고, 맛집과 핫플레이스를 누비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지금의 나는 혼자인 게 가장 편안했다. 그리고 그만큼, 외로웠다.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는 혼자 오지 않았다. MBTI가 있다면 E일 것이다. 꼭 친구들을 데리고 오니까. 바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사람이 많은 곳은 힘들었고, 규모가 크거나 출구가 한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손에 땀이 차고 어지러움이 따라왔다. 그 시기의 내가 할 수 있는 외출은 집 앞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정도였다.


회사에 다닐 때는 전화와 카톡, 슬랙 알림이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울렸다. 늘 빠르게 답장하던 나였는데, 이제는 무기력 때문에 며칠, 심하면 몇 주씩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 휴대폰은 점점 시계처럼 변해갔다. 알림은 줄었고, 대화는 사라졌고, 내 감정도 함께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던 나는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혼자 다니던 카페에서 찍은 사진

대체 무기력이 왜 온건지 궁금해 남은 힘을 다해 인터넷을 뒤졌다. 그곳에서 본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무기력은 하고 싶은 게 없을 때 오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너무 오래하고 살았을 때 온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그렇게 하기 싫어하며 살아왔던 걸까. 그 질문만큼은 검색으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외출할 때면 모자와 마스크, 양산까지 챙기게 됐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검색할 때만 해도 우울증과 대인기피증까지 함께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감정들을 온몸으로 맞이해야 했다.


결국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무섭다고, 혹시 그 앞에서 공황이나 불안한 모습을 보일까 봐 그 가능성 자체가 두렵다고. 하고 싶은 게 없고, 너무 무기력해서 잠만 자고 싶다고. 그러다 보니 우울이라는 감정이 점점 나를 잠식하는 것 같다고.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불안으로 시작된 일은 종종 이렇게 우울로 이어진다고. 대인기피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기운이 있으면, 사람은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그 말은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너무 불안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불안과 공황, 그리고 회피가 이어진 자리에 조용히 우울이 어느새 앉아 있다는 걸.


우울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소리 없이 들어와 일상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숨 쉴 공간을 줄여간다. 그 안에서 나는 아직 버티고 있었지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 질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건.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 그보다 먼저,

'왜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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