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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등학생의 등교 준비물

눈치 챙겼니?


"언니, 바빠요?"

"아니야. 괜찮아. 애들 학원 다 보내고 커피 한 잔 하자고 연락한 거야?"

"언니 바쁠 것 같지만 너무 심란해서 전화했어요."

"왜? 무슨 일 있어?"

"저 00이 담임선생님 호출받고 상담하고 나오는 길이예요."

"엥? 오늘 개학 첫날이고 4교시 후 애들 무탈하게 하교했던데?"

"그러게요. 개학 첫날부터 우리 아들은 어미를 호출받게 했네요."

"너 목소리부터 너무 안 좋다. 답답함 풀자. 내가 지금 나갈 테니까 5분 후 카페에서 만나."


00 이와 우리 둘째는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인연으로 가족들까지 함께 캠핑하며 일상을 나누고 있다. 5학년이 되어 다시 같은 반이 되었고 00 이의 학교 생활을 둘째를 통해 전해 듣고 있었다.  00 이가 똑똑한데 눈치 없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성격이라 소위 말하는 선을 넘는 경우가 있어 00이 엄마, 아빠는 00 이를 교육시키고 단속시키느라 늘 애쓰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 아메리카노만 먹는 거 알지만 오늘은 달달한 거 먹어. 스트레스받을 때는 당 보충해야 해."

"00이 담임선생님 전화받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놀란 가슴 진정시키려 투샷으로 진하게 내려서 마시고 학교 상담 갔어요."

"그럼, 크림 버블 밀크티 마셔봐. 너 평소였음 달고 배부르다고 못 먹을 음료지만 오늘은 적극 추천하고 싶다."

"네, 언니 추천 믿고 마셔볼게요."






00이 이야기를 급하게 꺼내지 않았다. 눈물 많고 여린 00이 엄마가 조금이라도 진정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오늘 아이들 개학했다고 카페마다 엄마들이 기분 내러 나왔더라. 나도 도서관 갔다가 혼자 조용히 카페 가서 작가 놀이 좀 해 볼까 하고 가는 길에 첫째 친구 엄마들 만나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떨고 점심까지 먹고 나니 애들 하교시간이더라고. 애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진짜 시간 안 가는데 내 자유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니?"

"언니 아침부터 바쁘셨네요. 지금 할 일 많은데 저 때문에 나오신 거예요?"

"아니야, 저녁에 하면 돼. 그리고 지금 네가 이렇게 심란한데 내가 안 들어주면 누가 들어주고 알아주니?"

"고마워요. 그래서 언니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잘했어. 바쁘고 시간 안되면 내가 못 나왔지."


내가 요즘 고민하고 쓰고 있는 글이 어쩌고 저쩌고, 작가 놀이도 흉내 내는 것도 어렵고, 휴가 계획도 안 세웠는데 벌써 떠날 날짜는 코 앞으로 다가왔고...... 

00이 엄마가 음료를 먼저 편히 마시도록 내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거 맛있네요? ㅎㅎㅎ"

"내가 우리 동네 다른 체인점도 가봤는데 여기가 제일 맛있어. 버블 삶은 정도도 적당하고 밀크티 농도도 알맞고, 위에 크림도 부드럽게 잘하더라고.ㅋㅋㅋ 난 이 집 최애 메뉴가 크림 버블 밀크티야. 배불러도 먹을 수 있어. ㅎㅎㅎㅎ"

"저 원샷하다시피 흡입했네요. ㅋㅋㅋ"

"그러게 너 음료 단 거는 싫어하는데 오늘은 이 음료가 딱 맞았나 보다. 추천인으로서 뿌듯한데?"

"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래. 난 이제 버블티를 마실 테니, 넌 00이 담임선생님 호출 이유를 풀거라."




00 이와 우리 둘째 담임선생님은 50대 남자 선생님으로 남자아이들 걱정 마시라던 분이시고 어지간한 일은 선생님 재량으로 다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학부모 호출을 했으니 대체 무슨 일일까 싶었는데 가끔 선을 넘는 아이의 행동이 더 나빠지기 전에 학부모와 상의한 후 학교에서 훈계하고 지도를 하겠다는 말씀이셨다.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개학 첫날 4교시 동안 몇 차례 자잘한 사건을 겪고 난 후 2학기 때는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학부모 입장에서 특히 엄마들은 학교 선생님께 전화받는 일이 너무 싫고 힘든 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전화로 끝난 게 아니라 직접 학교로 나오시라는 호출이니 00이 엄마는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은 00 이를 지도했을 때 개선의 여지가 보이고, 그 어머니를 만나보니 충분히 더 잘 클 수 있는 아이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00 이가 똑똑하고 말귀 알아들으니 선생님이 같이 잘 키워보자고 부르신 거네."

"눈치가 없죠. 늘 학교 갈 때 눈치 챙기라고 하는데 그동안 방학 때 긴장 풀고 있다가 오랜만에 학교가 니 흥분해서 선을 넘었나 봐요."

"눈치 없는 애, 등교 전 눈치 챙겨야 하는 애 우리 집에도 한 놈 있잖아.ㅋㅋ"

"그래도 언니 아들은 사회성이 좋아서 가끔 눈치 없이 행동해도 선을 넘지 않는데 울 아들은 눈치 없고, 선 넘고, 사회성까지 부족해서 늘 사건에 휘말리죠."

"아직 어려서 그래. 그리고 1학기 학기 초보다 학기말에 더 좋아졌고, 이제 2학기에도 눈치 챙겨서 등교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00 이의 똑똑함과 장점을 더욱 발현시킬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키워보자.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누굴 위로하니?"

"왜요? 언니네 두 아들은 성격 좋고 학교 생활 잘하잖아요."

"학교 생활 잘하는지 연락이 안 오는 건지 모르지. ㅎㅎㅎ 우리 집도 꼴통 때문에 천불 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꼴통 짓은 귀엽죠. 근데 선을 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사과하고 죄송해야 하는 일을 만드는 아들이 이해가 안 돼요. 타일러 보고, 훈계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우리가 뭘 잘못 키운 거냐며 속마음까지 다 이야기해봐도 그때뿐이더라고요."

"집집마다 자식 문제로 사연 없는 집 없는 것 같더라."



모범생에 엄친아인 것처럼 보이는 옆집, 교우 관계가 힘들어 학교 다니기 싫어하는 사춘기 자녀를 둔 집, 공부에 손 놓고 책가방만 메고 다니는 아이를 키우는 집도 모두 저마다 자녀 문제로 걱정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늘 바르고 반듯하게 자라주면 좋겠지만 다 큰 어른도 아직 철없이 행동하고 덜 성숙한 사람이 많은데 이제 막 사회를 배워가는 아이들에게는 잘 가르쳐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를 키울수록 부모라는 이름이 너무 어렵고 버겁다. 나 역시도 알아서 잘 커왔다고 생각했기에 아들 둘을 키우면서 이해되지 못한 부분들을 직면할 때면 난감하고 화가 나는 일도 많았다.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고 갈 길이 멀지만 조금씩 내려놓고 숨 고르기를 해가면서 그들의 걸음 속도에 맞춰 함께 걸을 수 있길 다짐해 본다. 


내가 해답을 줄 수 없고, 앞으로 00 이의 변화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답답한 속을 꺼내 보이고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속상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00이 저녁은 맛있는 걸로 해주고 잘 이야기해 본다는 00이 엄마야 말로 좋은 엄마라 여겨졌다. 


00 이가 눈치 잘 챙겨서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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