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영어교사가 되었다만 - 어쩌다라고 하기에는 꽤나 긴 쑥과 마늘의 시간이 있었지만 - 나는 여전히 그리고 내내 내 영어에 자신이 없다. 영어라는 단어에 붙어버린 수많은 함의와 편견, 그리고 과도한 관심에 덩달아 질려버릴 것도 같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다소간 영어에 열등감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동경하거나 그 반대로 자신의 영어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난 사실 어려서부터 아니 커서도 언어에 별다른 흥미를 가진 적이 없고 엉덩이로 외우는 것을 잘하다 보니 그냥 그렇게 적당히 점수를 받았었던 것뿐이다.
그러다 대학에 갔다. 처음으로 영어로만 수업하는 필수교양수업에 충격을 받았다. 난데없었다. 이제껏 내가 배운 영어는 뭐였나. 왜 생각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가. 왜 내 주변에 학생들은 이미 이런 상황을 모두 예상했다는 듯이 자유자재로, 마치 미군부대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내내 과외라도 받은 듯 유창한 건가.라는 고뇌를 했었다. 영어를 잘하면 무지 폼이 났고 그렇지 않은 나는 쭈구리 같았다. 그러다 유학을 마음에 품고 방학 때마다 토플과 GRE시험을 가열차게 준비하다가 그만 영어실력이 늘고 말았다.
부모님이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나를 지원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 혼자 차곡차곡 유학준비를 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덜컥 겁이 나서 유학에 대한 뜻을 접었고, 이번엔 교대를 가겠다며 수능준비를 했다.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때가 26-7살.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을 가기엔 체감상 상늙은이 같아서 그즈음 삶의 패배자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 유학도 포기, 교대도 포기, 그럼 사대를 가자. 그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다. ‘그럼 무슨 과를 갈까‘ 하다가 좋아하진 않지만 유학준비하며 조금 친해진 영어를 전공으로 고르게 됐다. 분명 내가 영어를 골랐는데 그게 고른건지 골라진건지 아리송하다.
그리고 나선 한참 뒤처진듯한 내 삶의 과업을 따라잡기 위해 적성이고 흥미고 나발이고 일단 임고에 합격하고 보자는 마음으로 지냈다. 나에게 영어는 줄곧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말하기는 말하기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것. 쓰기는 쓰기 시험을 잘 봐서 가산점을 따기 위한 것. 온통 시험에 관련되어 있을 뿐이니 즐길 틈이 없었다. 아.. 사범대를 다니며 원서를 가까이하며 읽기는 했다. 그도 어느 교수님이 한 학기에 원서 몇 권 읽고도 시험 떨어지면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하
그런 먼먼 여정 끝에 합격을 하고 영어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 특히 말하기가 두렵다. 이것은 상당히 심리적이고 성격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두렵긴 마찬가지다.
남들은 미드나 외국인친구 사귀기, 팝송, 외국 연예인 덕질, 게임하며 외국인과 수다 등 뭐 하나에 빠져서 귀도 트이고 말도 트인다던데 나는 도무지 빠져지지가 않았다. 그나마 나에게 맞는 것이 있다면 ebs 영어 방송 듣기였다. 정돈되고 정제된 영어와, 우리 정서에 딱 맞는 설명, 검증된 진행자. 이런 것들이 마치 영원히 킥판을 붙잡고 수영을 배우는 겁 많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만 어쩐담. 난 그런 스타일인걸.
그래서 2007년부터 듣기 시작한 입트영은 16년째가 되었고 입트영 밴드에 들어가 운영한 지는 6년째가 되었다.
이 징글징글한 영어는, 난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마치 부부가 중매로 만나 살맞대고 오래 살다보니 그 연의 시작이 연애였는지 중매였는지 하등 중요하진 않은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다 영어로 대학원까지 다니게 되었다. 이번 학기에는 영어 발표수업을 하나 듣는데 수업 내용은 별 게 없고 매시간 영어나 수업과 관련된 주제로 발표를 하고 질문받고 질문하는 것이다. 난 오늘 입트영을 주제로 첫 발표를 했다. 얼마나 영어말하기에 자신이 없는지, 얼마나 직업을 밝히기가 부끄러운지. 그러다 어떻게 입트영을 만나 매일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지. 어쩌다 내 영어도 영어지만 열정적인 운영자가 되었는지를.. 무려 영어로 한 15~20분 정도 이야기했다. 이제껏 학교 다닐 때 영어발표를 몇 번 했지만 이렇게 스크립트가 전혀 없이 슬라이드만 잠깐 보고 내 이야기를 영어로 풀어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여전히 떨고, 간혹 말문이 막혔지만 질문도 많이 받아 총 40분간 앞에 서 있었다. 사실 오늘의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이제 처음 엄마 없이 심부름을 간 날처럼 뿌듯했다. 계속 이렇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꾸 하다 보면 얼추 유창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