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축제 홍보
가을이 오면 고등학교에서 축제를 했다. 떠올려보면 뭐 대단한 거라기보다 각 동아리에서 외부 손님을 위한 발표회 같은 것을 했다.
그 동아리도 모든 학생이 다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학생들만 가입해서 활동했다. 1학년 때 입학하자마자 동아리 홍보 기간이 있고 신입생들이 지원했다. 선배들은 지원서도 받고 압박면접도 보면서 엄선해서 회원을 선발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방송반에 지원했는데 낙방해서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풍물패, 문예창작반이라면 모를까 방송반은 뭐랄까 좀 트렌디하고 외모도 어느 정도 괜찮고, 말도 잘해야 합격하는 것 같았다. 그 분야에 대해서 경쟁력이 없나 보다 하고 고배를 마셨다.
지금 와서야 문예창작을 들어갔으면 아니래도 뭐라도 합격했으면 학교생활이 더 풍요로워졌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다.
고1 때는 주변 학교 축제에 놀러 가기도 했다.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괜찮다 싶은 옷을 입고 친구들이랑 우르르 갔다.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는데 남고의 축제는 왠지 설레는 이벤트였다. 서늘한 가을 공기와 함께 아무 일도 없지만 왠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설렘이 일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주변 **고에 그 학교 역사를 연구하는 동아리였다. 으잉? 세계사, 근현대사도 아니고 학교역사까지나 연구한다고. 싶었지만 사실 그 오빠들이 뭘 연구하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수의 관객인 우리를 겨냥해서 뭔가 설명해 주는 그 상황이 설렘포인트였다.
다른 여느 동아리도 돌아보았지만 유독 기억이 나는
것은 그 **고 오빠가 수더분한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느낌이 받아서였다. 동아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문과 너드의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이성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기회가 없고 경쟁력이 없었을 뿐 호기심은 왕성했구나 뒤늦게 깨닫는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어 또다시 축제철이 찾아왔다. 주변 학교에서 홍보하러 학교 앞까지 와서 홍보물을 나눠주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아침 자율 학습시간에 조용히 공부하는 가운데 밖에서 **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꼰데스라는 구호를 크게 외쳤다.
꼰데스 데스카 데스카라 마스카 움바타 움바타 서울 서울 빅토리 야
교실은 일시에 술렁거렸다. 또래 남자들의 굵직한 목소리에 마구 흔들렸던 셈이다. 그때 우리의 어쩐지 안쓰럽고 어딘가 재밌는 담임선생님이 그 분위기를 바로 감지하고 “여러분 흔들리면 안 돼요. 60여 일 남았어요.”하고 멘탈교육을 하셨다. 뭐 그 소리에 흔들리면 얼마나 흔들린다고 담임선생님의 과도하게 진지한 목소리가 재밌었다. 그 와중에 우리 반에 화통한 성격의 부반장 미진이가 “우리 열녀교육받는 거 같아”하는 말에 또 와하하하하고 웃음이 터졌다.
고3 때는 축제에 가지 않았다. 어제가 오늘처럼 오늘이 내일처럼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외우고 문제 풀고를 반복했다. 반 친구들도 몇몇의 공부에 영 관심 없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잘하든 못하든 서로를 격려해 주는 분위기였다. 찰나지만 영원 같고 영원할 것 같지만 찰나였던 고3시절 한 자락의 기억이다.
고3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던다야
우리는 흔히 그 노력을 고3 때 했어봐라 서울대 갔다는 말을 해. 그만큼 인생을 살다 보면 고3 때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시기가 오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고3은 치열하게 살았던 대표적인 기간이기도 해.
오히려 고3 그 이후에는 여러 변수들이 너무나 많이 작용하고 그 분투가 외롭기도 해. 고3 때는 전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는 고3‘이라고 응원해 주는 그런 정서가 있잖아.
그런 무드. 그런 게 의외로 참 중요하잖아. 그래도 첫 인생의 관문을 거치느라 애쓰고 있어. 넌 잘 모르겠지만 넌 아주 잘하고 있어. 그 울적한 마음만 걷어내고 아주 씩씩하게 전진하는 마음만 가지면 돼.
그것도 차차 생기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참 그 남자에 대해서도 말인데. 연애도 아쉽지 않을 만큼 하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
필요한 경험들은 미래에 순서에 맞춰 착착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오늘도 응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