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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pr 11. 2021

일기장 해독해본 이야기

[단비글] '일기'

방 정리를 하다 초등학생 시절 썼던 일기를 다시 들춰본 적이 있었다. 여름 방학 숙제로 썼던 일기였다. 일기 속에는 4B연필의 굵은 글씨로 ‘해리포터를 읽었는데 재미있었다’ ‘만화책을 읽었는데 재미있었다’처럼 방학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했다. 그 외에도 영화를 봐서 재미있었고, 학원에 가서 재미있었고, 친구와 만나서 재미있었다는 둥 온갖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득 이상했다. 귀찮은 방학 일기를 쓰며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일기를 쓰던 때를 떠올려 봤다. 방학 마지막 날에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밀린 일기를 쓰고 있는 소년 맹구(필자)가 보였다. 7월 24일 자 일기를 쓰던 맹구는 단어 하나를 쓰고 흘깃 컴퓨터를 봤다. 다시 단어 하나를 쓰고 이번엔 엄마 표정을 살폈다. 아뿔싸! 눈이 마주쳤다. 잔소리를 피해 일기장으로 납작 엎드리며 허둥지둥 손을 움직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4B연필의 모서리가 가운뎃손가락에 자국을 만들었다. 장이 넘어갈수록 글씨는 직선에서 곡선으로, 곡선에서 자유선으로 변했다. 8월 30일 자 일기를 다 썼을 때 맹구는 컴퓨터를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다. 다시 엄마한테 걸렸다.
 
 정신이 들었다. 다시 일기장을 봤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해리포터를 읽었는데 재미있었다’는 문장은 ‘해리포터는 재미있는데 이걸 쓰는 건 하기 싫어 죽겠다.’로 고쳐졌다. 7월 24일자 일기는 ‘엄마 잔소리를 피해 이곳에 진실을 적는다. 나는 일기가 아니라 게임 하고 싶다고’로 통째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 8월 30일 자 일기에는 모든 내 감정이 압축돼 있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하기 싫은 건 처음이었다!’
 
 일기장의 진실이 드러나게 한 것은 일기장에 적힌 글자를 쓴 손과 그날의 기억이었다. 이처럼 시간, 공간, 인물, 등 글자 이면에 있는 맥락을 종합적으로 생각할 때 그 글의 진짜 내용이 드러난다.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그 글이 나온 시기는 언제인지, 그 글이 써진 장소는 어디인지와 같은 여러 정보를 글과 함께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글자에 속지 않으려면 개인의 비밀이 들어있는 일기라 할지라도 경계하며 읽자. 소년 맹구의 방학 일기처럼 글자는 거짓을 말하고, 기억이 진실을 말하는 때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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