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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pr 16. 2021

나에게 쓰는 일기

[단비글] '일기'

내가 일기를 열심히 썼던 시기들은 공통점이 있다. 격한 감정을 지니고 지낸 나날이었다. 수능 시험을 준비하던 10대 시절의 일기, 군대에서 힘든 시기에 적은 일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적은 일기.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우연히 그 시절의 일기를 보게 되면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솔직하고 과격한 날것의 표현이 가득 들어있다. 내가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그래서 행복하기도 했고 힘들어 하기도 했던 그 때의 시간과 대상이 지금의 나에겐 아무렇지 않아진 것이다. 과거의 기록된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어진 과거의 내가 답답하기도 하고, 조금은 미워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가끔 아니 종종 그보다는 자주 그립기도 하다.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 일기장의 모습은 언제나 빈 종이다. 새하얗게 비어있는 종이에 차곡차곡 감정을 얹은 글씨를 이어나간다. 어느 날은 파도가 치면 사라질 모래로 만든 성을 쌓고, 어느 날은 알록달록 색깔의 레고블록으로 장난감을 만든다. 그 날의 감정을 담아 일기를 만들어갈 때는 고해성사를 할 때보다 더 솔직한 마음을 담아낸다. 화가 났을 때는 주체할 수 없는 육두문자가 나오기도 하고, 벅차오르는 사랑을 하는 날엔 세상에 온갖 예쁜 것들을 가져와 비유를 늘어놓기도 한다. 일기에 기록된 문장들은 벅차오르는 날의 감정을 정리한 것이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크고 작은 거짓말을 늘어놓는 게 일상인 내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을 혼자만 볼 수 있는 빈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그 때는 하나의 거짓도 없는 것만 담아냈다 생각했는데 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걸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과거의 나와 달라진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어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중히 해야 할 것을 못 본 척하는 어른은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라서 절대로 저런 어른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에 세상에 온갖 예쁜 것들을 가져와도 모자랄 정도로 사랑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 봐온 만화 속 주인공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학교가 끝난 뒤에 친구와 함께 옆 동네로 모험을 떠나지도 않는다. 만화 속 주인공 이야기와 어른들 눈 밖으로 떠나는 모험을 하는 어린 시절을 이해 못하는, 어린 시절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그런 어른이 됐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이젠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해가 지고 더 이상 하루가 지나가 더 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쌓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기장 속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나는 하루를 허투루 보내는 자신을 되돌아 보기 위한 기록을 하고 있다. 격한 감정을 담아내던 과거의 일기와는 많이 다른 일기를 빈 종이에 적어가고 있다. 지금의 일기를 나중에 보게 됐을 때 어떤 감정이 들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다. 조금은 더 예전에 쓰던 일기처럼 솔직하게 적어봐야겠다. 단순히 하루의 생활 기록이 아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진심을 담은 기록을 쓰게 된다면. 


꿈만 같은 어린 시절의 일들이 시간이 지나며 이젠 소중한 기억으로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일기장에 적힌 이해를 할 수 없는 지금의 나날의 기록도 언젠가는 소중한 기억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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