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비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글방 Apr 04. 2021

다 이유가 있는 법

[단비글] ‘일기’

원래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아서 온다고 하던가. 일주일 중 가장 많은 스케줄이 있는 오늘이 딱 그랬다. 평소와 달랐다. 나는 꿈을 잘 안 꾸는 사람인데, 그날은 너무나 생생한 악몽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하루를 시작했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2시간 이른 새벽 5시, 회색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내 배를 마구 난도질하는 꿈에 배를 감싸 쥐며, ‘헉!’하고 일어났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기숙사라 중앙 난방을 하도 틀어놔서 방이 찜질방처럼 절절 끓었는데도 등 뒤가 시렸다. 학기를 시작한 지 한 달 동안 정신없이 적응하느라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값을 치른 걸까. 아무튼 오늘 시작은 그랬다.


나올 때도 당황스러운 순간이 연이어 일어났다. 37.8도. 체온을 쟀더니 나온 온도였다. 코로나19 때문에 열이 37.5도보다 높으면 나가기가 힘들었다. 기숙사 로비가 떠나가라 우는 알람에 사감 선생님이 깜짝 놀라 내게 다가왔다. “학생, 열나는데?” “아뇨. 아마 기숙사 바닥 난방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멀쩡한데.” “그럼 손목 한 번 재봐.” 37.3도가 나왔다. 기준보다는 낮지만, 날 보는 사감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봐도 되죠?” 3주 내내 주말까지 대학원동에 가서 공부하고, 과제를 하고 있지만 해야 할 일은 도무지 줄지 않아 오늘 안 나가면 내일이 너무 힘들 터였다. 사감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 기숙사를 나왔다.


기숙사에서 대학원동까지는 걸어서 800m. 한 300m쯤 갔을 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안 가지고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 대충 후드를 쓰고 가기로 했다. 열이 오른 덕에 마스크 속 공간이 한껏 데워졌다. 공부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이야. 괜히 아파오는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연구실로 드디어 올라왔다. 하도 일찍 올라와서 그날 아침에는 건물에 나밖에 없는 듯 했다. 스위치를 하나, 둘 켠다. 젖은 후드를 벗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부팅되는 몇 초 동안 눈을 감는다. 조용한 연구실을 창문 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점점 가득 채운다. 깜짝 놀라 밖을 쳐다보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미친 듯이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써도 홀딱 젖는 그런 비였다.


순간 ‘일찍 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엥? 아까까지만 해도 오늘 아침부터 재수가 너무 없어서 짜증났었는데. 이런 거 하나로 기쁜 이유는 뭘까. ‘모든 불운이 지금의 기쁨을 위한 액땜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악몽도 꿨고, 열도 나고, 비도 좀 맞았고, 오늘 해야 할 일이 스케줄러에 빼곡하게 적혀있지만 이 조그만 행복에 난 기쁨만을 느꼈다.


아이들은 시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했던 그 기억, 열심히 해서 결과를 얻은 그 ‘기쁨’을 기억하는 거지, 구체적인 점수는 기억 못 해요.

예전에 오은영 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내내 겪은 불행한 일들은 지금의 행복감만을 나중에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오늘을 포함해 살다가 겪을 수많은 힘든 일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이 감정만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불행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오늘 일기 쓸 때는 이 ‘소소한 행복’만 적을 것 같다. 기록해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기장 해독해본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